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採薪之憂(채신지우)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

採薪之憂(채신지우)


땔나무도 못 할 만큼
나무꾼의 깊은 우환(憂患)

 

신하가 임금에게
자신의 병 일렀던 말

 

후대엔
자신의 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語 義> : 나무꾼의 憂患(우환). 땔나무를 할 수 없는 우환.
             (신하가 임금에게 자신의 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出 典> : 孟子(맹자) 公孫丑章句下(공손추장구하) 二(이)

 

 

孟子(맹자)가 장차 齊(제)나라 왕에게 문안드리러 가려고 하였을 때, 왕이 사람을 시켜서 말을 전해 왔다.

 

“寡人(과인)이 가서 만나볼 것이나, 감기가 들어서 바람을 쐴 수 없다. 선생이 나와 주시면 만나볼까 한다. 혹시 과인이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실는지?”

 

맹자도 또한 대답하여 가로되,

 

“불행히도 병이 있어, 문안을 드리러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 이튿날 맹자가 東郭氏(동곽씨) 댁에 弔問(조문 : 남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어 상주를 위로함)하러 나가려고 하였다. 公孫丑(공손추)가 말하기를,

 

“어제는 병이 났다 하여 나가는 것을 謝絶(사절 : 요구나 제의를 받아드리지 않고 물리침)하고, 오늘은 조문하러 나가시니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맹자 가로되,

 

“어제 앓다가 오늘 나았는데, 왜 조문하러 가지 못하겠는가?”

 

왕이 사람을 시켜서 문병을 하고 의원을 보내왔다. 孟仲子(맹중자 : 공자의 아우)가 그 문병 온 사람에게 말했다.

 

“어제는 오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땔나무를 할 수 없는 우환이 생겨서, 조정에 나가지 못하셨습니다. 오늘은 병이 좀 나아서 서둘러서 조정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잘 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둘러대고는) 여러 사람을 시켜 길에서 맹자를 찾아 집에 돌아오지 말고, 꼭 왕을 뵈러 가시도록 이르게 하였다.

 

<原 文> 王使人問疾醫來(왕사인문질의래) 孟仲子對曰(맹중자대왈) “昔者有王命(석자유왕명) 有采薪之憂(유채신지우) 不能造朝(불능조조) 今病小愈(금병소유) 趨造於朝(추조어조) 我不識能至否乎(아불식능지부호)” 使數人(사수인) 要於路曰(요어로왈) 請必無歸而造於朝(청필무귀이조어조)

 

여기서 ‘采(채)’는 ‘採(채 : 캐다. 가리다)’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맹중자는 형인 맹자가 왕을 뵙지 못한 것을 ‘나무를 할 수 없는 우환’, 즉 ‘나무꾼이 병이 들어 나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로 대신한 것인데, 당시에는 신하가 자신의 병을 낮춰 이를 때 이 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후대에 의미의 범위가 넓어져 ‘남에게 자신의 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 일반화되었다.

 

※ 孟子(맹자, B.C.372?~B.C.289?) : 孔子(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 전국시대 鄒(추)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軻(가)이고, 자는 子輿(자여) 또는 子車(자거)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를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공자가 죽은 지 100년쯤 뒤에, 산동시 성추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 전반기이다.

 

家系(가계)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춘추시대 노환공의 후예가 나뉜 3대족(맹손씨, 숙손씨, 계손씨) 가운데 맹손씨의 후대인데, 당시 노나라에서는 맹손씨가 집권층이었지만, 추나라로 이주한 맹자의 가문은 이미 몰락한 뒤였다. 어머니 仉(장)씨는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로 유명한 현모로서, 어머니에게 큰 감화를 받으며 학교의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인 子思(자사)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당대에 묵적과 楊朱(양주)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 사상을 확립했다. 40세 이후에 仁政(인정)과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遊歷(유력)했다.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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