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의 문화산책] 탈춤은 현대에도 가능한가?

  • 등록 2025.05.26 11: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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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은 현대에도 가능한가?

칼럼니스트 김승국

 

탈춤은 춤과 노래와 풍자와 해학이 있는 자유를 향한 춤이다

 

우리 탈춤은 2022년 11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탈춤은 탈을 쓴 연희자들이 마치 오늘날의 뮤지컬처럼 삼현육각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하고, 연기하는 놀이꾼과 구경꾼이 함께 판을 짜는 대동 놀이이다.

 

탈춤은 지역에 따라 탈춤, 놀탈, 탈놀이, 탈놀음, 산대놀이, 광대놀이, 들놀음(야류), 오광대, 덧뵈기 등으로 부른다. 우리나라 탈의 재료는 바가지 탈, 종이탈, 나무탈 3가지이다.

 

우리의 탈춤을 지켜보면 대사가 있기는 한데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가면(탈)은 서구의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가면과는 달리 얼굴 전체를 가리는 형태로 제작되었고 입이 막힌 가면이 대부분이며 입 부분이 뚫려 있다 해도 좁아서 대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대신 탈춤은 무용극을 연상할 정도로 신명 나는 음악 반주에 맞춰 남성적인 춤을 위주로 표현되기 때문에 애초부터 대사극 위주가 아니라 춤이 위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통칭하여 탈춤이라 부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탈춤은 가무적(歌舞的) 성격이 우세하여 원초적인 놀이성을 강조하는 독특한 연출법을 보이며 발달, 전개, 전환,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갈등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탈이 갖는 익명성, 은폐성, 상징성, 표현성에 덧붙여 일반 서민들의 삶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고 있는데 파계승, 몰락 양반 등을 등장시켜 현실 도덕의 추악함과 특정 지배계층의 비리를 공격하면서 극적 갈등을 더해간다.

 

탈춤의 역사는 선사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탈춤은 한국인의 낙천적인 성격과 여유가 담겨 있으며, 춤과 노래와 풍자와 해학이 있는 대사를 통해 서민 계층의 삶 속에 투영되는 지도 계층의 부도덕을 고발하여 서민들의 불만과 갈등을 해소하고 이어지는 뒤풀이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들과 관중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춤으로써 하나로 단결되는 동시에 새로운 삶의 동력을 되찾는다. 마을에서는 탈놀이가 끝나면 탈이 액(厄)을 상징한다고 하여 액을 불태워 없애는 의미에서 탈을 모닥불에 태워 없애고 함께 뒤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면 우리 탈춤의 역사는 언제부터였을까? 두 눈과 입을 뚫은 선사시대의 조개껍질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탈춤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고구려의 무악(舞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와 오기(五伎) 등에 탈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탈춤은 고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조를 거쳐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조선 조정에 의하여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으로 정립되었다. 산대도감극은 도시형의 탈놀이로, 조선 궁중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의 관장 아래에서 산대라고 불린 무대 주위에서 연행되던 때의 호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궁중 주도의 탈춤이 조선조 인조 재위 시 폐지된 후 민간주도의 탈춤이 전국에 퍼져나가

 

그러나 인조(仁祖) 12년(1634년) 이후 공의(公儀)로서의 산대연희(山臺演戱)가 폐지되었다. 폐지된 이유는 복합적인 이유였는데 가장 큰 이유는 유학(儒學)을 숭상하던 사대부들은 산대희(山臺戱)의 내용이 유학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했으며, 사회 최하층의 창우(倡優)들이 연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이들은 풍기문란을 이유로 일반 백성과 부녀자의 관람을 반대하는 등 지속해서 산대희의 거행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산대(山臺)놀이 연희자들은 궁중천역(宮中賤役)에 종사하던 자들로 서울 문밖에 살았다. 정부 주도의 산대희가 폐지되자 산대(山臺)놀이 연희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이 단체 계(契)를 모으고 제각기 경향 각지를 순연(巡演)한 결과 18세기 초에 녹번리산대, 애오개(아현)산대, 노량진산대,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 등 본산대(本山臺) 놀이가 생겼다.

 

이후 이들 본산대 놀이의 영향을 받아 양주별산대(揚州別山臺), 퇴계원산대, 송파산대 놀이가 생겼고 19세기 초반에 오늘날과 같은 오락을 위한 민속극 형태의 탈춤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는데 지역마다 다른 명칭과 특징을 지닌 채 오늘날과 같은 오락을 위한 민속극 형태의 평민극인 탈춤이 형성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연행되는 탈춤은 연희자와 관객이 함께 어우러져 판을 벌이는 대동 놀이적 성격을 갖고 있다. 지역 탈춤은 풍년, 풍어 등 생산의 풍성함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 번영을 비는 마을 축제인 마을굿과 함께 마을 단위의 애호가나 주민들에 의해 공연되었다.

 

또한, 탈춤을 즐기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기부금을 내어 공동으로 교육하고 탈을 제작하여 공연하였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탈춤은 오랜 시기에 걸쳐 우리 민족의 중요한 놀이의 한 양식으로 전승됐다.

 

탈춤, 서울·경기에선 산대놀이, 경남에서는 오광대, 남사당에서 덧뵈기로 불려

 

현재 각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탈춤을 살펴보면 함경도에는 북청사자놀음, 황해도 지방에는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강원도 지방에는 강릉관노탈놀이, 서울 지역에는 송파산대놀이, 경기도 지방에는 양주별산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 경상북도 지방에는 하회별신굿탈놀이, 병산 별신굿 탈놀이, 자인팔광대놀이, 경상남도 지방에는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대, 부산 지방에는 수영야류(들놀음), 동래야류(들놀음), 남사당놀이에는 덧뵈기 등 다양한 탈춤이 전승되고 있다.

 

경기도 지역은 산대놀이 혹은 별산대놀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었는데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중심으로 산대놀이가 성행한 데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서울, 경기지방은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연행되고 있는 민중 탈춤의 본류로서의 지역적 특징을 갖고 있다.

 

황해도 지역은 탈춤과 놀탈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었는데 춤이 중요시되었고, 잘 놀아야 탈놀이가 된다는 의미에서 놀탈이라고 했다고 한다.

 

 

경상도 지역은 야외에서 공연하는 가면극이라고 하여 들놀음(야류), 다섯 명의 연행자가 주역이 되는 연극이라고 해서 오광대, 마을에서 하는 특별한 공연예술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별신굿놀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었다.

 

충청도 및 전라도 지역은 탈춤의 전승 지역에서 제외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탈춤 이외에도 많은 무형문화유산이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풍물놀이의 잡색은 탈춤의 변형된 전승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익명성과 일탈성이 있는 탈을 매개체로 하는 지역 축제 성공 가능성 커

 

탈은 자신을 숨기는 익명성이 있어서 탈을 쓰면 더욱 대담하고 자유로워지는 일탈성(逸脫性)을 갖고 있어 탈춤은 누구나 쉽게 하나로 어우러지기가 쉽다. 현대적인 탈춤의 전승은 약화한 구성원의 결속을 강화해 주는 역할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라져 가는 축제의 의미를 부활시킬 수 있다. 따라서 지역에 탈춤을 주제로 한 축제를 한다면 지역의 공동체적 삶이 더욱 풍요롭게 강화될 것이다.

 

 

따라서 탈을 매개체로 하는 지역 축제는 다양한 지역 주민을 함께 모아 지역 주민의 화합 마당을 이루어낼 수도 있을 것이며, 아이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전통 문화유산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하는 교육적 의미도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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