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공연] 겨울 남산 자락에 내린 비와 함께 기억된 밤, 전통과 즉흥의 경계를 허물며 춤과 음악으로 새긴 이은솔의 30년 나이테

  • 등록 2025.12.26 19: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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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버텨낸 시간에 보내는 다정한 격려의 무대
소리와 몸이 서로를 깨운, 미친 콜라보의 밤
30년 춤의 나이테 뒤에 서 있던 이름, 최종실 스승께 드리는 감사

 

겨울 남산 자락에 내린 비와 함께 기억된 밤, 전통과 즉흥의 경계를 허물며 춤과 음악으로 새긴 이은솔의 30년 나이테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 남산국악당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이번 공연의 이 공연의 연출이자 국악학원 이사장인 최종실 선생을 뵙고자 분장실로 향하던 길, 무대 앞을 먼저 스쳐 지나가게 됐다. 피아노, 드럼, 기타, 베이스, 건반 같은 서양 악기들이 대금·피리·장구·꽹과리 등 전통 악기들과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춤공연에 음악 공연이 중간중간 놓이는 형식이구나 싶었다. 순간, ‘사운드의 세팅이 춤의 흐름을 거스르진 않을까’ 하는 의문이 살짝 비쳤다.

 

분장실에서 만난 최종실 선생은 그 의문을 가볍게 지워주었다. 공연의 취지와 작품의 방향, 그리고 제자이자 안무가·예술감독으로 무대의 중심에 서는 이은솔 무용수에 대해 하나씩 풀어놓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목소리에는 30년 수련의 무게를 짊어진 제자를 무대에 세우는 스승의 자부심이 가득했다. 열정은 나이와 비례해 식는 것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몸을 이끄는 힘임을 다시 느끼게 했다. ‘나이가 들어서 열정이 식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식어서 나이가 든다’는 말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공연의 첫 장면은 예상보다 훨씬 과감했다. 월드뮤직 기반의 전통창작그룹 거꾸로프로젝트가 울림의 첫 호흡을 잡았다. 드럼과 베이스의 심장 박동 같은 저음 위로 대금과 피리의 선이 얹히며, 인간의 심연 깊은 곳을 가만히 건드리는 사운드가 극장 공기를 먼저 흔들었다. 그 소리 위로 등장한 이은솔은 궁중정재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의상과 함께 움직였지만, 그 춤사위는 오히려 ‘움직인 듯 움직이지 않은 듯’ 절제되어 있었다. 고요와 장중함, 우아함이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했다. 눈과 귀가 동시에 열리는, 흔치 않은 출발이었다.

 

 

무대 뒤 대형 스크린 대신, 이번 공연의 배경은 ‘소리 자체’였다. 작품마다 서양 악기와 전통 악기가 뒤섞인 편성으로 실시간 호흡을 주고받으며 움직임의 배경이 되고, 때로는 움직임이 음악의 변주를 끌어내는 듯한 구조를 만들었다. 춤과 음악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의 숨을 읽으며 교차하는 ‘과감한 공존’의 방식이었다. ‘미친 콜라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무대는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예술이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설장구와 원영조 교수와의 재즈 피아노 협업으로 완성된 〈이음〉도 ‘장단’이라는 전통의 뼈대 위에 ‘즉흥’이라는 서양의 근육이 붙어 서로 다른 몸의 균형을 만들어냈다. “처음엔 막막했지만 반복된 연습 끝에 서로의 호흡이 맞아가는 전율과 성취가 컸다”고 회고했다.

 

절절한 구음과 독백, 창작무용의 흐름은 감정의 결을 극대화했고, 마지막에 놓인 최종실류 소고춤에서는 모든 악기와 리듬이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합류하며 조화의 정점을 찍었다. 전통은 고정된 옛것이 아니라, 현재의 심장 박동으로 다시 설계될 때 가장 강력한 유산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했다.

 

 

이날 이은솔은 직접 출연진을 소개하며 “이 공연은 춤을 시작한 지 30년이 된 올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같은 날”이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꿈처럼 말하던 기념 공연이 실제 무대가 되었고, 많은 예술가와 관객이 함께해 준 순간이 오랜 수련의 시간을 버텨 온 자신에게 건네진 선물처럼 느껴졌다는 뜻이다.

 

이은솔은 “춤을 추려면 소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글자를 안다고 독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알아야 독서가 되는 것과 같다.” 그는 음악의 박자와 흐름을 먼저 읽은 뒤 춤을 설계해 왔고, 그 과정이 있어야 자신만의 색과 의미가 정확히 전달된다고 믿는다. 〈무산향〉 재해석에서도 “음악은 새로워졌지만 춤의 틀, 호흡, 감정만큼은 전통에 가깝게 지켜야 한다”고 판단해, 연주자들에게 장단을 원곡 그대로 연주해 달라고 요청했다로 한다.

 

그는 스승 최종실 선생을 만나 무대에 대한 태도가 가장 크게 바뀌었다고도 말했다.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선생님을 만나, 내가 무대를 즐겨야 보는 사람도 함께 즐겁다는 걸 배웠다.” 그 가르침은 30년의 춤길을 관통하는 전환점이 되었고, 그래서 그는 지금의 자신을 “잘 달리고 있는 이은솔”이라고 정의해 달라고 한다.

 

이은솔과 스승 최종실

 

무용수 이은솔의 30년은 무대 위에서 ‘결’로 증명되었고, 그 결을 설계한 최종실의 시선과 연출은 공연 전체의 중심을 흔들림 없이 붙들었다. 국악을 향한 그의 오랜 철학과 현장 감각, 장르의 확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출력은, 한 예술가의 30년을 기리는 무대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되었다.

 

 

송혜근 기자 mulsori7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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