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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 위령제(慰靈祭)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 위령제(慰靈祭)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에는 은산별신제 사당인 은산 별신당(恩山 別神堂)이 있다. 한적한 충청도 시골 마을 은산천(恩山川)을 끼고 자리 잡은 모습이 위풍(威風)도 당당하다. 별신제(別神祭)는 마을의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그런데 이 별신(別神)이란 단어는 그 뜻을 여러 가지로 추정하고 있다. 신을 특별히 모신다는 뜻에서 왔다는 이야기, 서라벌(徐羅伐)의 ‘벌’처럼 평야나 들을 뜻하는 말로 평야의 신을 모시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설, ‘배신’, 즉 선신(船神)을 말하는 것이라는 이야기, ‘별’의 어원이 ‘밝다’라는 뜻에 있음을 두고 광명을 바라는 신앙을 뜻한다는 설 등등이 있으나 정확한 의미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은산 별신당(恩山 別神堂)

 

은산별신제는 매년 3월 말에 지내는 마을 제사이자 축제이다. 이 축제에는 아주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과거 은산면 지역에 괴질(怪疾 : 괴상한 질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던 때에 어떤 한 노인의 꿈에 백제 장군이 나타나 자신과 함께 죽은 병사들의 유골을 수습해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 유골들을 찾아 잘 묻어주고 위령제를 올렸다. 그러자, 마을을 감돌던 전염병이 사라졌고 다시 평안을 찾았다. 이때부터 마을에서는 신당에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는데 이것이 이 별신제다. 실제 별신당 뒷산에 백제의 항쟁 장소인 은산당산성이 있어 이야기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은산별신제는 3년에 한 번 윤달이 든 해에 지내왔으나, 최근에는 짝수 해에 대제(大祭), 홀수 해에는 소제(小祭)로 구분하여 3월 말에 지내고 있다.

 

은산별신제를 직접 구경하기 위해 날을 잡고 기다렸으나, 올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쉽게도 공개행사를 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조용히 펼쳐져 있는 마을 곳곳의 이야기 현장만 사진에 담고 내년을 기약하기로 했다. 필자가 은산별신제를 꼭 보고 싶어 한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백제부흥군(百濟復興軍)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말을 타고 있는 장군이 제의절차(祭儀節次)에 등장하는 독특함 때문이다.

 

제의절차(祭儀節次)

 

은산별신제는 100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규모의 행사이다. 아쉽게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도서와 영상 등의 자료를 통해 확인한 대략적인 절차는 이렇다. 제사음식 준비하는 과정, 재원 마련을 위해 집굿을 돌며 걸립(乞粒)하는 과정, 장군행렬이 진대를 베는 행사, 제상 꾸미고 상을 차리는 상당 행렬, 본제, 상당굿, 하당굿, 독산제, 장승제 등의 제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음식으로는 술과 제사음식을 준비하는데 먼저, 술을 담글 물을 준비하기 위해 개울에 금줄을 쳐서 3일간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이를 ‘물 봉하기’라고 한다. 그 물로 조라술이라는 제사에 쓰일 신주(神酒)를 준비하고, 제사에 쓰일 음식도 준비한다. 이 준비 과정은 화주(化主)라고 하는 은산별신제를 주관하는 사람 집에서 준비하는데 남자만 참여한다. 이어 마을 어귀에 세울 장승을 만들고,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돌며 지신밟기를 해서 무운을 빌어주는 ‘집굿’을 벌인다. 과거에는 이 걸립(乞粒) 활동을 통해 별신제의 재원을 마련했다고 한다.

 


1939년 기념사진(출처 : 국립무형문화재연구소 기록도서)

 

은산별신제의 제의절차 중 독특한 행사는 장군 복장을 하고 말을 탄 대장(大將)이 군졸을 이끌고 나서서 어린 참나무인 진대를 배어오는 절차가 아닌가 싶다. 이 진대는 부정한 기운을 막는 역할을 하는 상징물로 장승과 함께 마을의 사방에 세워진다. 1930년대의 기록 사진에도 말을 탄 장군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행사의 오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보존회 사무실 벽에 크게 인화돼 자랑스럽게 게시된 이 사진은 일제 강점기에도 행사가 지속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은 신당을 꾸미기 위해 형형색색의 지화(紙華)와 화등(花燈) 등을 절에서 준비해서 받아 오는데 이를 ‘꽃 받기’라고 한다. 이 꽃은 화주(化主) 집에 보관했다가 제삿날 별신당으로 옮겨 와 장식한다. 다음 절차는 화주 집에 보관 중인 제물을 별신당으로 옮기는 '상당행사'이다. 이동 중에 입에 한지를 물도록 하여 ‘말’에서 오는 부정을 막는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된다.

 

상당 행사를 마치면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그날 밤 별신당에서 유교식으로 축문을 읊으며 본제를 지낸다. 이 축문에는 많은 장군(將軍)이 등장한다. 다음 날 오전에는 별신당의 앞마당에서 무당이 춤과 노래로 신령을 위로하는 상당굿이 벌어진다. 이때 키가 아주 큰 대나무 기를 세우는데 그 끝에 방울을 달아 놓았다. 이 대가 흔들리며 방울 소리가 나면 신이 내린 징표로 삼는다. 이를 ‘대 내림’ 의식이라 한다.

 

은산별신제의 제의절차

 

오후에는 굿당 아래에 있는 보존회 앞마당에서 하당굿을 벌인다. 이 제의식(祭儀式)은 별신제에 초대받지 못한 여러 원혼을 위로하는 행사인데 마을 주민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대동굿이 벌어진다. 여기까지 끝이 나면 행사를 주관하는 화주가 행사를 잘 마치게 해 준 산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독산제와 장승과 진대를 세우는 장승제가 동시에 진행되며 은산별신제라는 대규모의 축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은산별신제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행사장에 금줄을 둘러 부정한 기운을 막고, 입에 한지를 물어 말을 금(禁)하는 등 치성(致誠)을 드리는 모습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의 진지하고 경건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유교식 제사, 불교식 꽃장식, 무교의 굿 의식 등이 섞여 연출되는 장대함이 놀라움을 준다. 마을 주민들이 기성회를 결성하고 함께만드는 마을굿이며, 산신을 모시는 산신제, 장군을 모시는 장군제 형식도 담고 있다. 백제부흥군을 위로하는 위령제의 의미도 담고 있어 아주 독특하고 복합적인 자랑스런 우리 무형유산이다. 영상을 통해서 전통의 종합예술축제를 한번 감상해 보기 바란다.

 

은산별신제의 음악 : 무악(巫樂), 농악(農樂)

 

은산별신제에 쓰이는 음악은 무악(巫樂)과 농악(農樂)이다. 무업(巫業)을 하는 무당(巫堂)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집안에서 무업(巫業)을 이어받아 무당이 되는 세습무(世襲巫)와 신내림을 통해 무당이 되는 강신무(降神巫)이다. 주로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은 세습무, 북쪽은 강신무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세습무는 가계를 통해 내려온 음악적 능력이 강신무는 신령성이 각각 돋보인다. 은산별신제는 한강이남(漢江以南)의 굿으로 호남지방의 굿과 음악적인 결을 같이한다. 무녀(巫女)는 살풀이장단, 시님장단에 육자배기토리 소리로 ‘축원가’와 ‘당산굿소리’ 두 곡을 삼현육각(三絃六角 :  향피리 2개, 대금, 해금, 장구, 북 등의 국악에서 흔하게 쓰이는 악기편성) 반주에 노래한다. 최근에는 화려한 무속 복색을 하고 노랫가락, 창부타령 노래를 부르는 등 한강이북(漢江以北) 지방 강신무(降神巫)의 무속이 가미되어 볼거리가 늘어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은산별신제 감상하기
https://youtu.be/UKUA0hCBCcU?si=vYsviNhcRYN5ooXM

 

농악은 길굿 장단, 행진 장단, 삼배구고두 장단, 재례 장단 등이 제례의 절차에 따라 쓰이는데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 계열의 가락으로 비교적 단순하다. 연주되는 동안 태평소가 시나위 가락, 능계 가락 등을 연주한다.

 

백제부흥운동 : 복신장군(福信將軍), 토진대사(土進大師) 그리고 부여풍(扶餘豐)

 

                   복신장군                                     산신도                                              토진대사

(출처 : 국립무형문화재연구소 기록도서)

 

은산 별신당에는 산신 영정 좌우에 복신장군(福信將軍)과 토진대사(土進大師)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은 1936년 조사된 자료의 축문에는 나오지 않다가 1961년 조사된 축문부터 등장한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예전에 없던 이야기가 삽입됐을 것이란 추측도 있는데 그에 대해서 예전에는 복신과 토진의 장군의 이름을 직접 쓰는 대신에 복신은 백마장군으로 토진은 영차장군이라고 표현하였다는 상응하는 대답도 있다.

 

복신장군은 《삼국유사》 백제본기에 나오는 인물로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담은 서동요의 주인공이자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의 조카로 승려 도침과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킨 사람이다. 은산별신제의 영정으로 모셔진 토진대사는 아마도 승려 도침의 오류일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부흥운동이란 역사적 사실을 접하고 본 필자의 관심을 끈 인물은 복신과 도침도 있지만 그들보다는 부여풍(扶餘豐)이었다. 부여풍은 무왕의 아들로 의자왕의 경쟁 관계에 있던 왕자이거나 의자왕의 아들로 왜에 살고 있던 백제 왕자이다. 일본에서는 부여풍을 그들의 사관(史觀)에 입각하여 인질이라고도 주장하고 있지만 어림없는 이야기임은 뒤에 서술하겠다.

 

부여풍은 백제부흥운동에 왜군을 참여시킨다. 부여풍이 거느리고 온 왜군의 규모는 놀랍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2만7천명, 《삼국사기》에는 1,000척의 병선(兵船), 《구당서》 유인궤전(劉仁軌傳)에서는 백강구에서 왜선 400척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663년 8월27~28일 양일에 걸친 백강 전투에서 백제의 구원을 위해 출병한 왜는 당시 세계최강 군대였던 당군과 4번을 싸워 패했다.

 

실패한 백제부흥운동 그 마지막 씁쓸한 이야기

 

필자는 백제부흥운동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한 복신장군과 승려 도침은 무려 20여 성을 회복하며 백제 부흥의 기치를 높인다. 하지만, 권력다툼 속에 복신장군은 도침을 살해한 뒤 그의 군대를 빼앗았고 부여풍마저도 살해하려다 그 의도를 들켜 죽게 된다. 이후 부여풍은 백강 전투에서 패한 뒤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가 고구려 패망 이후엔 당의 포로가 되어 유배되었다 한다.

 

한편, 백제부흥운동에는 흑치상지(黑齒常之)라는 장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흑치상지가 임존성에 자리 잡고 백제의 부흥을 이끌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열흘 만에 그 규모가 3만 명에 이르게 된다. 이 위세로 그는 200여 성을 회복하기도 했지만 백강 전투의 패배 이후에는 세력이 쇠퇴하였다. 그러던 중 당(唐)에 항복한 백제의 마지막 태자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되찾겠다 항전하는 그의 백성이 있는 임존성에 당도한다. 이를 맞대한 흑치상지는 부여융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투항하고는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이 지키고 있는 그 임존성을 공격하는 만행(蠻行)을 저질러 그 성을 함락시킨다. 부여융과 흑치상지의 배신은 이렇게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흑치상지를 배신자로 평가했다. 수없는 친일파들을 경험한 그였기에 백제부흥운동을 배신한 그에게서 친일 부역자들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어느 영화에서 본 해방이 될지 몰랐다는 친일부역자의 변명이 떠오르며 씁쓸한 마음이 가실 길 없다. 배반한 흑치상지는 당에 가서 어마어마한 전공을 쌓아 영웅적 존재가 되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 중국 역사 유일의 여황제)는 저런 명장이 있는 나라가 어찌 망했느냐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동료의 모함을 받아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말로(末路)를 맞이하였다.

 

일본천황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다!

 

이쯤에서 고대사회 한반도와 왜의 관계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며 분위기를 전환해 보고자 한다. 가야금을 만든 가야의 가실왕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시쯔’라는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 《신창성씨록》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계의 성씨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백제부흥운동을 위해 부여풍은 2만7천명의 왜군을 1천 척의 배에 태워 참전시켰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를 인질로 있는 왕자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파견한다는 게 말이 될까? 중국에서 당나라 시대인 678년에 세워진 비석에서 日本이란 글자가 발견되자 일본 언론은 자국의 국명이 사용된 가장 오랜 기록이 나왔다며 대서특필(大書特筆)한 적이 있는데, 저명한 사학자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학교 교수가 그 일본(日本)이란 글자는 국명이 아니라 당(唐)에서 볼 때 동쪽 즉, 해가 뜨는 곳 백제(百濟)를 의미한 것이라고 밝힌다. 백제가 패망하고 부흥운동마저 실패 한 뒤부터 왜는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710년 그들의 수도를 ‘나라!’로 천도하고 공식적으로 국호를 일본으로 사용한 나라시대(奈良時代)를 연다. 2002년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을 보면 일본 천황이 자신을 백제 무령왕의 후손임을 직접 밝힌다. 이 일련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이필영,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 은산별신제, 화산문화, 2002
홍태한, 은산별신제 연구, 민속원, 2016
한만영, 이보형. 「은산별신제의 음악적 연구」. 『동양음악』 제1집, 1977, 61~81쪽
노정숙, 「은산별신제 농악 연행에 관한 연구」, 『동양음악』 제49집, 2020, 9~45쪽
김현구. 「심포지움 1 : 백제부흥운동과 백강 ; 백강전쟁과 그 역사적 의의」,  『백제문화』 제32권, 2003, 129~140쪽
양종국, 「의자왕 후예들의 과거와 현재」, 『백제문화』 제32권, 2004, 159~188쪽 
양종국. 「흑치상지와 백제부흥운동-재검토의 필요성」, 『先史와 古代』 제55권, 2018, 67~89쪽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별신굿」
인산티비 은산별신제(2022년 공개행사)
https://www.youtube.com/watch?v=UKUA0hCBCcU

한겨레신문 2012년 6월6일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6435.html#csidx191f9cc57c55bd38f32285aaeb88d88
KBS 역사스페셜 1부(2002.02.16.) - 미스터리 추적 일본 천황은 백제인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On8o7gJb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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