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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초가(四面楚歌)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사면초가(四面楚歌)


전쟁에 지쳐 있는
초(楚)나라 군사들이 

 

초(楚)나라 노래 들으니
고향 생각 눈물 젖네

 

항복(降服)한
초나라 군사들
더욱 커진 노랫소리

 

* 출전은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記), 사방이 모두 초나라의 노래, 곧 주위가 모두 적으로 둘러싸인 것을 가리키는 말. 사면을 적에게 포위당하여 고립 상태에 빠짐. 

 

 

 

楚(초)나라의 覇王(패왕) 項羽(항우)와 漢(한)나라의 劉邦(유방)이 천하를 다투던 때, 항우에게 마지막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끼던 슬기로운 장수 范增(범증)마저 떠나 버리고, 결국 유방에게 눌려 한나라와 강화하고 동쪽으로 돌아가던 도중, 垓下(해하)에서 한나라의 명장 韓信(한신)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항우의 군대가 垓下(해하)에서 진을 쳤을 때, 병졸은 줄어들고 군량미도 얼마 남지 않았다. 漢(한)군과 諸侯(제후)의 군사에게 겹겹이 포위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한군의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왔다.

 

항우가 곧 크게 놀라 말하기를,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저렇게 많은고?”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초나라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그리운 고향의 노래 소리에 눈물을 흘리며 다투어 도망을 쳤다. 항복한 초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한, 한나라 재상 張良(장량)의 작전이었다.]

 

항우는 곧 밤에 일어나, 진중에서 酒宴(주연)을 베풀었다. 항상 총애하여 데리고 다니는 虞(우)라는 이름의 미인과, 항상 타고 다니는 騅(추)라는 이름의 명마가 있었다. 이때에 항우는 곧 강개하여 슬픈 노래를 부르고, 스스로 시를 지었는데,

 

「힘은 산을 뽑도다, 기운은 세상을 덮었네.
  때가 불리하도다, 騅(추)마저 나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가지 않는구나. 어찌하랴, 어찌하랴.
  虞(우)여, 虞(우)여. 그대를 어찌할거나.」

 

항우는 이 노래[垓下歌(해하가)]를 몇 번이고 불렀다. 우미인도 거기에 和答(화답)하니, 항우는 몇 줄기의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좌우의 신하들도 모두 우느라, 능히 우러러 보는 자가 없었다.

 

그날 밤 虞(우)미인은 시에 화답한 후 자결하였고, 항우는 불과 800여 騎(기)를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한 이튿날, 혼자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수백 명의 목을 베었다. 강만 건너면 처음 군사를 일으켰던 땅 江東(강동)으로 갈 수 있는 烏江(오강)까지 달려갔다. 그러나 항우는 군사를 다 잃고 돌아가는 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을 쳐 자결하고 말았다. 이때가 기원전 202년으로 그의 나이 31세였다.    

 

※ 項羽(항우, B.C.232 ~ B.C.202) : 楚(초)나라의 왕으로, 霸王(패왕)이라고도 불린다. 본명은 籍(적)이며, 羽(우)는 그의 자이다. 초나라 명문의 후손이다. 초나라 명장 향연의 손자로 조부가 죽고 초나라가 멸망하자, 숙부 項梁(항량)과 함께 회계의 오중으로 숨어, 숙부 손에 자랐다. 陳勝(진승), 吳廣(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숙부와 함께 봉기하여 회계 군수 은통을 참살한 뒤, 8천여 군사를 이끌고 차례로 주변 세력을 병합하였다. 얼마 후 숙부 항량이 죽자, 스스로 상장군이라 칭한 뒤, 도처에서 진나라 군을 무찌르고 드디어 함곡관을 넘어 關中(관중)으로 들어갔다.    이어 앞서 들어와 있던 劉邦(유방)과 홍문에서 만나 이를 복속시켰으며, 秦王(진왕) 子嬰(자영)을 죽이고 도성 함양을 불사른 뒤에, 팽성에 도읍하여 서초 패왕이라 칭하였다. 초나라 義帝(의제)를 받들었으나, 기원전 206년 의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였다. 이는 뒷날 金宗直(김종직)의 弔義帝文(조의제문)의 모델이 되었고, 한편 유방으로 하여금 찬탈자를 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유방과 다툴 때, 초반에는 참모 范增(범증)의 조언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이를 간파한 한의 陳平(진평)이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아 결국 범증을 잃고 말았다 <이를 중국 제 2대 哀歎(애탄)이라 한다>. 그 후 항우가 이끄는 초군은 유방이 이끄는 漢(한)군의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항우는 마지막에 單騎(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모두 격파하여 포위망을 뚫었으나, 고향의 동료들을 생각하며 무상함을 느끼고, 끝내 자신이 꽂아놓은 창에 뛰어들어 자결을 하고 말았다. 항우는 진나라와의 거록전투, 유방과의 수수전투를 통해, 중국 역사상 최고의 무예와 통솔을 자랑하는 장수이다. 전문가들은 장수의 재능으로는 항우를 역사상 중국 최고라고 평가한다.

 

※ 劉邦(유방, B.C.247 ~ B.C.195) : 漢(한)나라를 세운 첫 번째 황제. 자는 劉季(유계), 묘호는 高祖(고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유방은 秦(진)의 하급관리인 쓰수이[泗水(사수)] 지방의 亭長(정장)으로 출발하여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秦(진)의 始皇帝(시황제)가 죽은 다음 모반을 일으켰다. 반군은 명목상 項羽(항우)의 지휘 아래 있었다. 항우는 진의 군대를 쳐부수고 많은 옛 귀족들을 복권시켰으며, 자신의 장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면서 진나라 이전의 봉건제도를 다시 시행했다. 그때 주요한 반군 지도자였던 유방은 지금의 쓰촨성[四川省(사천성)]과 산시 성[山西城(산서성)] 남쪽, 즉 중국 서부 지역의 제후인 漢王(한왕)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이들은 곧 적대관계가 되었으며, 농민 출신의 경험과 영리함을 갖춘 유방은 군사적으로 뛰어났으며, 정치적인 면에서 고지식했던 항우를 패배시켰다.

 

유방은 학자들을 싫어하여 학자의 관에 오줌을 누어 혐오감을 표시하기도 했으나, “馬上(마상)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여 유교의 예를 채택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통치 체제는 官制(관제)의 경우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했으나, 지방 통치의 경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郡國制(군국제)였다. 그는 한나라 건설에 공이 큰 부하 장수들과 친인척들을 諸侯王(제후왕) ‧ 列侯(열후)로 봉해 각지에 내보냈다. 그러나 후에 그는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가장 공이 컸던 韓信(한신) ‧ 彭越(팽월) ‧ 英布(영포) 등의 공신, 제후들을 모두 처형하고, ‘제후왕은 한나라의 일족에 한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왕조의 기초를 굳건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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