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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兎死狗烹)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도 삶아지네

 

‘종리매(鐘離眛)’의 목을 들고
‘유방(劉邦)’ 찾은 초왕 ‘한신(韓信)’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을 포박(捕縛)하자
화를 내며 외친 말

 
* 출전은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토끼가 죽으면 개를 삶는다.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가 필요 없어 주인에게 삶아 먹힌다. 필요한 때는 쓰고 필요가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린다. 

 

 

范蠡(범려)는 중국 춘추시대 越(월)나라 왕 句踐(구천)이 吳(오)나라를 멸하고, 春秋五覇(춘추오패)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한 名臣(명신)이다.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뒤, 구천은 가장 큰 공을 세운 范蠡(범려)와 文種(문종)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왕 구천에 대하여 고난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영화를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여 월나라를 탈출하였다.

 

齊(제)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문종을 염려하여,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良弓藏(비조진양궁장) 狡兎死走狗烹(교토사주구팽)].”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하였으나,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하고 말았다. ‘兎死狗烹(토사구팽)’이라는 故事(고사)는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뒷날 한신이 유방에게 죽음을 당하기 전에 범려의 이 말을 인용하였다.

 

※ 范蠡(범려, ? ~ ?) :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완지[지금의 허난 南阳(남양)] 사람으로 越(월)나라의 정치가, 군인. 자는 少伯(소백). 吳(오)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越(월)나라를 침범해 왔지만, 기발한 계책으로 오나라 군대를 급습하여, 吳王(오왕) 闔閭(합려)에게 상처를 입히고 오나라 군대를 초토화시킨다. 이 상처로 합려는 결국 죽고 만다. 합려의 사후, 뒤를 잇게 된 오왕 夫差(부차)는 伍子胥(오자서)의 도움을 받아 복수의 칼날을 간다. 오나라의 복수를 두려워한 句踐(구천)은 미리 오나라를 침략하려 한다. 범려의 만류에도 월왕 구천은 出兵(출병)하여 대패하고 만다. 월왕 구천은 부차에게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신하를 자처하고, 문종은 부차의 측근인 재상 伯嚭(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구천을 살리도록 설득했다. 이때 오자서는 구천을 죽일 것을 적극 간하지만, 西施(서시)와 같은 빼어난 미인까지 받친 월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선에서 끝내고 만다.

 

거짓된 충성심을 보여주고,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범려와 문종의 보좌를 받아, 복수할 저력을 키우면서 밖으로는 부차에 순종적인 모습만 보여줘 방심을 유도한다. 더욱이 범려는 뇌물을 계속 보낸 백비에게는 부차와 오자서 사이를 離間(이간)하도록 유도한다. 결국 부차는 오자서를 죽이게 되고, 월나라 군대는 부차가 출병한 틈을 타 오나라를 급습하여 皇子(황자 : 황제의 아들)를 죽이고, 또 4년 후 전쟁을 일으켜 부차를 궁지에 몰아넣고 자살하게 한다.


<出典>② 史記(사기)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

韓信(한신)은 漢(한)의 劉邦(유방)과 楚(초)의 項羽(항우)와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한신을 楚王(초왕)으로 봉했으나, 언젠가는 자신에게 도전할 것을 염려하였는데, 마침 항우의 장수였던 鐘離眛(종리매)가 옛 친구인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일찍이 초와의 전투에서 종리매에게 괴로움을 당했던 유방은 종리매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가 楚(초)에 있다는 것을 알자, 유방은 종리매를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한신은 차마 옛 친구를 배반할 수 없어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 사실을 상소한 자가 있어 유방은 陳平(진평)에게 상의했다. 진평의 책략에 따라 유방은 雲夢(운몽)에 행차하고, 제후들을 초 서쪽 경계인 陳(진)에 모이게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한신은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진해서 배알하려고 했다. 그러자 평소에 술수가 남다른 가신이 한신에게 속삭였다.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배알하시면, 천자도 기뻐하시리다.”

 

옳다고 생각한 한신은 그 말을 종리매에게 했다. 그러자 종리매는
“유방이 楚(초)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자네 밑에 내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자네가 나를 죽여 유방에게 바친다면, 자네도 얼마 안 가서 당할 것일세. 자네의 생각이 그 정도라니 내가 정말 잘못 보았네. 자네는 남의 長(장)이 될 그릇은 아니군. 좋아, 내가 죽어주지.” 하고는 스스로 목을 쳐 죽었다.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유방에게 바치지만, 유방은 한신을 포박하게 했다. 그래서 화가 난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도 잡혀 삶아지며, 높이 나는 새도 다 잡히고 나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이 타파되면 모신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팽당함이로다.

 

<原文> 果若人言(과약이언) 狡兎死良狗烹(교토사양구팽) 高飛鳥盡良弓藏(고비조진양궁장) 敵國破謀臣亡(적국파모신망) 天下已定(천하이정) 我固當烹(아고당팽).

 

※ 鍾離眜(종리매, ? ~ B.C.201) : 중국 秦(진) 말 ~ 前漢(전한) 초의 무장으로, 伊盧(이로) 사람이다. 楚(초)의 項梁(항량) ‧ 項羽(항우)의 거병에 참여하여, 진 멸망 후 초한전쟁에서 항우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劉邦(유방) 휘하의 陳平(진평)의 계략으로 항우와 멀어졌다. 항우가 죽은 후, 종리매는 옛 친구인 韓信(한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帝位(제위)에 오른 유방은 한신을 楚王(초왕)에 봉하였으나, 종리매가 楚(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붙잡을 것을 명하였다.

 

또한, 어떤 자가 유방에게 한신이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고 讒言(참언)하였다. 유방은 진평의 계략을 받아들여 남쪽에서 사냥한다고 하고 제후들을 불러 모은 후, 한신을 습격하려고 하였다. 한신은 유방을 뵈어 자신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음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체포를 두려워하여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한신에게 종리매를 죽이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설득하였고, 한신은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이 사실을 안 종리매는
“漢(한)이 楚(초)를 공격하지 않는 것은, 내가 貴公(귀공)에게 몸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오. 혹시 귀공이 나를 잡아 漢(한)에 아양을 떨고자 한다면, 나는 오늘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소만, 귀공도 언젠가는 망할 것이오.”라고 말하며,

 

“貴公(귀공)은 덕이 없는 사람이오!”라고 한신을 모독하고는 자결하였다. 한신은 종리매의 首級(수급)을 들고 유방을 만났으나, 체포된 후 淮陰侯(회음후)로 격하되었다. 종리매에게는 장남 鍾離發(종리발)과 차남 鍾離接(종리접)이 있었다. 종리발은 九江(구강)에서 가문을 이었고, 종리접은 潁川郡(영천군) 長社縣(장사현)에 살면서 성씨를 鍾(종)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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