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衣繡夜行(의수야행)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衣繡夜行(의수야행)


수(繡)를 놓은 비단옷 입고 
어두운 밤 다니는 건

 

크나큰 출세를 하고  
고향 가지 않음일세

 

아무도 
알아주지 않네,
무슨 보람 있겠는가


출전(出典) : <史記(사기)> 項羽本紀(항우본기)
어의(語義) : ‘수놓은 옷(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다닌다.
                  - 자랑삼아 하지 않으면, 생색이 나지 않음.
                  - 자기가 아무리 잘 하여도, 남이 알아주지 않음.


 

중국 秦(진)나라 말엽은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혼돈의 시대였다. 沛公(패공) 劉邦(유방, B.C.256 ~ B.C.195. 한나라를 세운 황제)은 패상의 군영에 도착하자마자, 曹無傷(조무상, ? ~ B.C.207. 진나라 말기의 장군으로서 유방에게 속한 무장. 유방을 모략하여 궁지에 몰아넣음)을 잡아 誅殺(주살)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진나라 도읍이었던 咸陽(함양 : 산시성에 있는 도시)에 군사를 이끌고 입성한 項羽(항우)는 屠戮(도륙)을 내는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나이 어린 秦(진)의 3세이자 마지막 황제 子嬰(자영, 재위 B.C.207 ~ B.C.206)을 죽이고, 阿房宮(아방궁)에 불을 지르고, 始皇帝(시황제)의 무덤까지 파헤치는 등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창고에 쌓아둔 보물들을 모두 차지해 버리고, 미녀들을 옆에 낀 채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타락해 가는 항우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謀臣(모신 : 일을 꾸미는 데에 뛰어난 신하) 范增(범증)은 올바른 제왕의 모습을 찾을 것을 간곡히 간했으나, 항우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재물과 미녀들을 손에 넣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韓生(한생)이 이렇게 말하였다.
 
“함양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땅도 비옥합니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시어, 천하에 세력을 떨치소서.”

 

그러나 항우는 한시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立身出世(입신출세)한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가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부귀해졌는데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에 길을 가는 것과 같다. 누가 이것을 알아주겠는가?”

 

<原文> 韓生說羽曰(한생세우왈) 關中阻山帶河(관중조산대하) 四塞之地(사색지지) 肥饒可都以伯(비요가도이백) 羽見秦宮室皆已燒殘(우견진궁실개이소잔) 又懷思東歸曰(우회사동귀왈) 富貴不歸故鄕(부귀불귀고향) 如衣錦夜行(여의금야행) 誰知之者(수지지자)

 

그러자 한생이 비웃으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웠을 뿐이라고 하더니[沐猴而冠耳(목후이관이)], 그 말이 정말이구나.”

 

이에 크게 진노한 항우는 한생을 가마솥에 넣고 삶아 죽여 버렸다. 그리고 항우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훗날 유방이 함양에 들어와 천하를 손에 넣었다. 

 

※ 范增(범증, B.C.277 ~ B.C.204) : 중국 楚(초)나라의 책사 · 정치가. 陳勝(진승, ? ~ B.C.208)과 吳廣(오광, ? ~ B.C.208)의 난 때, 나이 70세에 項梁(항량, 중국 진나라 말기의 반란군 지도자로 항우의 삼촌)을 섬겼다. 楚(초) 懷王(회왕, 제37대 임금. 재위 B.C.328 ~ B.C.299)의 자손을 왕으로 옹립해 신망을 받을 것을 진언하였다. 항우에게 亜父(아부 : 아버지 다음가는 사람, 임금이 공신을 존경하여 부르던 말)라는 존칭을 받았다. 유방이 항우와 초나라를 위험하게 할 것을 예상하며, ‘鴻門之會(홍문지회 : 항우와 유방이 함양 쟁탈을 둘러싸고 홍문에서 회동한 일)’에서 유방을 죽이려고 했지만 項伯(항백, 정치가이자, 무장. 명장 항연의 아들, 항량과 형제, 항우의 숙부)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초한 전쟁이 격렬해지자, 유방의 모사 陳平(진평)의 反間計(반간계)에 빠진 항우에 의해 쫓겨난다. 항우에게 퇴출당하고 천하를 떠돌다가 악성 등창이 생겨 실의 속에 죽었다. 범증 없이 뒤늦게 전쟁에서 패배한 후, 반간계에 빠졌던 사실을 알게 된 항우는 크게 후회하였다.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