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簞食瓢飮(단사표음)

 

시조로 새겨 읽는 고사성어(故事成語)

簞食瓢飮(단사표음)


도시락 밥 표주박 물
‘안회(顔回)’의 청빈한 삶

 

끼니를 거르면서도 
삶의 기쁨 누렸구나

 

‘공자(孔子)’는
두 번씩이나
어질다고 칭찬했네


출전(出典) : <論語(논어)> 雍也篇(옹야편)
어의(語義) : 도시락밥과 표주박의 물.  * ‘一簞食一瓢飮(일단사일표음)’의 준말.
                  - 구차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 ⇒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


 

孔子(공자)는 일생 동안 무려 3천 명의 제자를 두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子貢(자공)처럼 理財(이재)에 밝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子路(자로)처럼 벼슬길에 나아가 성공한 사람도 있고, 顔回(안회)처럼 가난하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공자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는 안회였다. 공자는 제자들을 그 역량에 따라 평하고 그에 맞는 충고를 하곤 했지만, 안회에게만은 늘 칭찬을 잊지 않았다.

 

공자의 기대에 맞추어, 안회도 워낙 학문을 좋아한 나머지 나이 29세에 벌써 백발이 되었다 한다. 자공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聞一知十(문일지십)]’며,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도 바로 안회이다. 그러나 안회는 매우 가난하여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이 했으며, 평생 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난은 그의 수행과 학문 연구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이런 안회를 보고 공자가 칭찬하였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곳에 거처하며 산다면, 다른 사람은 그 근심을 견디어내지 못하거늘,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안회여.”

 

<原文> 賢哉回也(현재회야) 一簞食一瓢飮在陋巷(일단사일표음재누항) 人不堪其憂(인불감기우) 回也不改其樂(회야불객락) 賢哉回也(현재회야)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사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므로, 공자는 두 번이나 ‘어질도다! 안회여.’라고 찬미한 것이다.

 

 雍也篇(옹야편)에는 이 말고도 안회를 칭찬하는 내용이 많다. 가령,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이 지나도 어진 것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겨우 하루나 한 달 동안 어진 것에 이를 뿐이다.”라든가, 哀公(애공)이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에 대해 묻자,

 

“안회가 있어 학문을 좋아하고 노여움을 오래 지니지 아니하며, 허물되는 일을 두 번 하지 않았으나,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일찍 죽은지라, 그가 떠나간 지금에 와서는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는 예 등이다. 요절한 안회에 대한 공자의 그리움이 절절하다.

 

공자의 말씀 이후 단사표음은 초야에 묻혀 사는 은사들의 생활의 표상이 되었다. 옹야편의 표현 그대로 ‘一簞食一瓢飮(일단사일표음)’이라고도 한다.

 

※ 子貢(자공, B.C.520년경 ~ B.C.456년경) : 孔門十哲(공문십철)의 한사람. 중국 춘추시대 위나라의 유학자이다. 본명은 端木賜(단목사)이다. 공자가가 아끼는 제자로서 언어에 뛰어났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노나라 ‧ 위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공자를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 子路(자로, B.C.542 ~ B.C.480) : 孔門十哲(공문십철)의 한사람.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정치가이자 무인이다. 季路(계로)라고도 부른다. 자로는 孔子(공자)의 핵심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자의 천하유세 동안 고난을 끝까지 함께 하였다. 자로는 공자가 살아 있을 때, 冉求(염구 : 공자의 제자)와 함께 노나라의 유력한 정치가였다. 공자와 14년의 천하주유, 망명 생활을 함께 했으며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갈 때 위나라에 남아서 공씨의 가신이 되었으나, 왕실 계승 분쟁에 휘말려‘괴외의 난’때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발효되어 젓으로 담가지는 수모를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크게 슬퍼하여 집안에 있는 젓갈을 모두 내다버렸으며, 이후에도 젓갈과 같은 종류의 음식만 보면, “젓으로 담가지다니!”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자로는 공자의 제자 중 최고 연장자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제자라기보다 가장 친한 친구요, 가장 엄격한 비판자였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공자가 문란한 陳后(진후) 南子(남자)와 회견하였을 때 분개하였으며, 공자가 두 번이나 읍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섬기려고 생각하였을 때도 항의하였다.

 

자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며, 논어의 안연편에는 그는 약속을 다음날까지 미루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맹자에 의하면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결점을 지적하면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는 용맹스러웠고 직선적이고 성급한 성격 때문에, 예의바르고 학자적인 취향을 가진 제자들과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의 성격은 거칠었으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으로 부모에게 효도하여 공자의 사랑을 받았다

 

※ 顔回(안회, B.C.514 ~ B.C.483?) : 자는 子淵(자연). 顔淵(안연)이라고도 한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는 학자, 정치가, 웅변가로서 뛰어난 사람이 많았으나, 안회는 덕의 실천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연구와 修德(수덕)에만 전념하여,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으며, 공자의 제자 가운데 겸허한 求道者(구도자)의 상징이 되었다. 32세(?)에 요절하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 도다”라고 탄식했다 한다.

 

저술이나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그의 자손은 공자 ․ 맹자의 자손과 함께 취푸[曲阜(곡부)]에 모여 살면서 명 ․ 청대에 安氏學(안씨학)을 세워 나라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 ‘簞食瓢飮(단사표음)’이 우리 문학에 사용된 예시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무슨 소원이 있으리오마는, 두세 이랑 되는 밭과 논을 다 묵혀 던져두고, 있으면 죽이요 없으면 굶을망정,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겠노라. 나의 빈천함을 싫게 여겨 손을 헤친다고(내젓는다고) 물러가며, 남의 부귀를 부럽게 여겨 손을 친다고(손짓을 한다고) 나아오랴? 인간 세상의 어느 일이 운명 밖에 생겼겠느냐? 가난하여도 원망하지 않음을 어렵다고 하건마는, 내 생활이 이러하되 서러운 뜻은 없다. ‘한 도시락의 밥을 먹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는’ 어려운 생활도 만족하게 여긴다. 평생의 한 뜻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없다. 태평스런 세상에 충성과 효도를 일로 삼아, 형제간에 화목하고 벗끼리 신의 있게 사귀는 일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 밖에 나머지 일이야 태어난 대로 살아가겠노라.

 

- <朴仁老(박인로, 1561 ~ 1642. 조선 중기의 문인)의 ‘陋巷詞(누항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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