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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1]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수난의 초상

 

안녕하세요, 국악타임즈의 애독자 여러분

 

우리 전통춤의 깊은 울림과 역사적 여정 속에서 살아 숨 쉬는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특별한 연재를 시작합니다.

 

'재인청 춤꾼 이동안: 수난의 시대를 살다간 한 춤꾼의 포괄적 초상'은 전통춤으로 일생을 바친 한 예술인의 헌신과 예술혼을 제자인 정주미가 조명해 내는, 때로는 치열하고 가열차게 때로는 담담한 필체로 담아 스승을 적어 내려간 에세이를 기획특집으로 연재합니다.

 

이 연재에서는 재인청 춤꾼 이동안 선생의 삶을 통해 한국 전통춤의 아름다움과 의미, 그리고 그가 살아온 시대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수난의 시대를 헤쳐 나가며 예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표현했던 이동안 선생의 삶은 단순한 춤사위를 넘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각 연재에서는 선생의 주요 작품과 그 의미, 춤을 통한 선생의 사회적 메시지, 그리고 제자들과의 교류 등 선생의 예술세계 전반을 다루어 깊이 있는 분석과 함께 담아내려 합니다. 더불어 선생이 남긴 유산이 오늘날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현대 전통춤에 끼친 영향과 그 의미 또한 탐구하려 합니다.

 

이 연재는 단순히 한 예술인의 전기를 넘어서, 우리 전통춤이 담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와 시대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동안 선생의 삶과 춤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현재와 미래의 예술인들, 그리고 모든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영감을 주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전통을 사랑하고 예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국악타임즈 편집부

 

* 재인청 춤꾼 이동안 연재는 진인진 출판사의 도움으로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진인진 출판사에 감사를 표합니다. 

 

저자소개

 

    저자 정주미

 

초등학교 3학년때 한국무용에 입문하여 국가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경남무형문화재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을 이수하였고 1992년, 춤꾼 이동안 선생을 찾아가 재인청 춤과 장단을 익혔다. 1998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이동안 춤 세계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양대학교 평생교육원 무용과 강의를 위해 「한국무용사 강의노트」를 집필했다.
전승 및 연구단체인 ‘재인청춤전승보존회’와 공연단체인 ‘재인청예술단’을 설립하여 재인청 춤의 전승과 대중화를 위해 어린이와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춤판> 및 <9988우리춤> 등의 공연을 펼쳐왔으며 <전통예술의 향기>, <해설이 있는 우리 춤>, <한여름밤의 춤>, <우리가 꾸는 꿈> 등의 기획 공연 시리즈를 통해 우리 춤의 대중화에 공헌하고 있다.
특히 2002년, 저자의 개인 공연인 <정주미 춤추러 간다> 시작으로 2004년부터는 재인청예술단의 정기 공연인 <재인청춤판>을 본격적으로 펼치면서 재인청 춤의 정수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프롤로그

춤꾼 이동안을 위하여

 

나는 춤꾼이다. 우리 춤에도 이른바 여러 유파가 있어서 굳이 유파 속에 나를 넣는다면 ‘재인청’이라는 유파의 춤꾼이다. 그런데 재인청은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파가 아니다. 정리하면, 재인청은 하나의 유파인데 유파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모순적 진술을 해명하기 위해 내가 십수 년 전에 수행했던 과업 하나를 소개한다.
2008년, 나는 한양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무용과 학생들에게 ‘한국무용사’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한국무용사 한 권을 골라 가르치면 될 일을, 나는 굳이 욕심을 부렸다. 삼국시대부터 항일시대까지, 나의 시각을 고집한 우리 춤을 들고 매주 강단에 섰다.
덕분에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우리 춤이 역사 속에서 일관되게 흘러내려온 본류가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 둘째, 본류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현장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현장에서 역동적으로 대응한 두 인물이 오늘날 ‘유파’로 나뉘는 변곡점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인물 중에 한 분이 바로 춤꾼 이동안이다. 다른 한 분은 한성준으로 그가 유파의 시작점에 선 조상 격이라면, 이동안은 우리 춤 역사를 관통하여 흘러온 본류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단순히 한 춤꾼이 아니라 그 춤꾼이 수행한 춤이 지닌 역사적 무게감을 알게 되면서, 나는 “너 왜 그냥 있어?”라는 끝 모를 채찍질에 시달려야 했다. 그 채찍에 대한 오랜 해답으로 이 책은 기획되었다. 쓰고 깁고 고치면서 마지막 고비는 책의 제목이었다. ‘마지막 광대 이동안’에서 ‘역사가 선택한 춤꾼, 이동안’, ‘춤꾼 이동안을 위하여’ 등등을 가지고 나는 내 안의 선생께 물었다. 선생은 무진무진 외로우셨던 모양이다. ‘재인청 춤꾼 이동안’에 이르러서야 미소를 보여주셨다.
자신의 생애를 바쳐 모종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선명한 자신의 지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한결같은 지고지순의 생애를 살아야만 그 경지라는 곳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리라. 이 경지에 올라선 이를 일러 우리는 ‘꾼’이라 불렀다. 자신을 어디에 바쳤다고 할 때, 바친다는 것은 분명히 의지의 영역이다. 의지의 영역이 있다면 의지와는 무관한 영역이 있을 터!
‘무용사’ 강의 이후로 나의 시선은 나의 스승 이동안 춤꾼에게 꽂힌 정도가 아니라 콱 박혀 있었다. 내가 만난 이동안 선생이 아닌 역사 속에서의 이동안 선생을 만난 것이다. 뜻밖이었다. 자연인 이동안의 삶과 춤꾼 이동안의 삶으로 분리한다는 자체가 어려운 인물인 것을.
어린아이 하나가 어느 날 자신의 동네에 들른 뜬광대를 따라 가출해버리고 어렵사리 가출한 아들을 찾아낸 아비는 춤은 물론, 온갖 기예를 익히도록 솔선한다는 것은 단순히 아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에피소드를 거친 수많은 이들이 모두 꾼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스승 이동안은 질곡의 역사 속에서도 ‘지고의 꾼’이라는 반열에 오름으로써 생의 화양연화를 구가하고 누린 분이었다.
그런 스승의 삶이 질곡의 시대와 맞물려 인생의 나락에 수없이 처박혀야만 했던 것은 큰 성취를 이룩한 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롤러코스터의 삶이었다. 스승께선 자신의 일상을 주제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법이 없었다. 오로지, 일관되게 재인청 춤에만 매달린 언어. 나는 그 낯선 언어들을 모아 일종의 어법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내가 처음 발굴한 어법은 자연인 이동안은 재인청 춤을 추도록 규정된 삶이었다는 사실이다. ‘춤꾼이 되기 위해 재인청으로 걸어 들어간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재인청 춤이 된 인물’이라 규정해야 마땅하다. 이 책에서는 나의 이러한 규정을 아주 편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왜 스승은 춤이 되었는지! 재인청의 예혼은 어린 이동안을 자신들이 걸었던 그 역사의 외길로만 이끌고 간 것인지!

2022년 가을
저자 정주미

 

 

 

차례

 

프롤로그
춤꾼의 문법

백까마귀와 묘소
용두동과 태평무
춤집 좋다
태평무 이수증
재인청 춤과 장단

 

광대와 재인청
조선조 최고의 예술기관, 재인청
모가비와 비가비의 연리지
그 핏줄을 어쩌랴
광대의 길

 

재인청 춤, 네 개의 스타일
귀거래사, 팔박기본무
태평성대, 태평무
절제된 신명, 진쇠춤
슬픔과 환희의 아포리아, 엇중몰이신칼대신무

 

살다보니
마지막 여인
지팡이가 된 춤꾼
눈물이 눈물을
무대라는 무덤

 

춤이 된 인생
천상 광대
질곡의 시기
허탈과 항변
예혼의 불씨

 

에필로그
이동안 선생의 연혁
저자 정주미의 재인청 관련 공연 및 전승 활동

 

 

춤꾼의 문법

 

백까마귀와 묘소
지난해 유월, 이동안 선생께서 잠들어 계신 천안의 풍산공원묘지, 선생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편 산기슭에서 훨훨 나는 새 한 마리,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백까마귀다!” 운전하던 김인순 부회장은 “백까마귀가 어디 있느냐? 까마니까 까마귀지.” 하는데 아무래도 까마귀라는 나의 지속된 강변을 무시하는 표정이다. 혹 까마귀가 아닌가 싶었으나 분명 두루미도 비둘기도 아니었다. 갈매기는 더더구나 아니었고 까치도 역시 아니다.
나는 최소한 참새, 까치, 까마귀 정도는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안다. 어린 시절부터 현재 내가 사는 집 주변에서도 늘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비록 흰색이었지만 그 형태가 분명 까마귀였다. 그런데 흰색이라니! 돌아오는 내내 신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돌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반응은 비슷했다. 백까마귀는 누구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야기란다. 내가 잘못 보았거나 다른 새를 까마귀로 여겼을 거라는 말과 함께.
인터넷을 뒤졌다. 있었다. 백까마귀. 그런데 첫 사진으로 등장한 사진이 심지어 내가 본 장면과 흡사했다. 그래서 또 한 번 놀랐다. 내가 본 장면을 누가 찍어 올린 듯한 소름이라니! 백까마귀는 천 년에 한 번 볼수 있는 새로, 중국에서는 백까마귀가 나타나면 황제가 제사를 직접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귀히 여기는 ‘천 년의 길조’라 한다. 그런데 백까마귀는 원래의 까만 까마귀 무리로부터 공격과 따돌림을 겪는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서 날고 있었던가!
위대한 광대였고 춤꾼이었지만 쓸쓸히 돌아가신 선생님이 그리워 매년 스승의 날 즈음이면 찾아뵙는 선생의 묘소. 묘비도 없는 덩그런 봉분 속에 누워계신 선생님을 뵈러 갈 때마다 늘 죄송하여 펑펑 울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 내가 만난 백까마귀는 선생의 현현일 수도 있다는 느낌적 느낌. 우리 민족의 춤 역사를 면면히 이어 내리신 재인청 바지춤의 마지막 춤꾼, 이동안 선생! 춤꾼으로서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묘비조차 없이 누워계신 선생께서 그리도 외로이 백까마귀로 날고 계신 것은 아닌지.
사실, 선생의 사후 3주기를 맞아 비석 건립을 위한 추모 공연을 주최한 적이 있었다. 민속학자 고 심우성 선생의 제안으로 추진되었지만, 취지와는 다른 험담과 험담이 낳은 여러 오해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던 아픔을 나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연전에 이 사연을 김동국 사진작가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워하시던 김 작가는 우선 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이라도 기록해 두자 하여 동행한 적이 있었다. 덕분에 선생의 묘소에 대한 자세한 지도와 친절한 안내까지 만들어 놓은 것은 작은 위안이었다.
백까마귀와의 조우로 빚어진 쓸쓸함 때문이었을까! 그저 그리움과 추모를 바치던 묘소 앞에서 올해는 처음으로 태평무를 췄다. 나름 외로 우실 선생을 위로하고 기뻐하실 것을 소망한 용기였다. 동행하신 안석균 옹께서 추임새와 손장단을 아끼지 않으신 데다 젊은 날 선생께 춤을 배운 적이 있어 덕분에 태평무가 어렵지 않게 신명으로 나아갔다. 안 옹께선 이동안 선생께서 엄청나게 좋아하실 거라며 연신 기뻐하시는데 둘러선 일행들 모두가 과연 선생께서도 기뻐하시리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선생의 묘소 앞은 신명으로 충만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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