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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4]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4]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춤꾼의 문법 4

 

태평무 이수증
나만의 태평무 장단이 만들어지고 그리 오래지 않아 선생께선 용두동 연습실을 서대문으로 옮기셨다. 서대문으로 찾아간 내게 선생께선 느닷없이 “다음에 올 때는 받아쓰기 준비를 해오라” 하신다.

그즈음 선생의 발음이 어눌해지고 있던 터라 자꾸 말씀을 여쭙는 건 무리다 싶어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무엇인가 글로 남겨야 할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지레짐작만 하고 국문학과 출신의 지인을 데리고 연습실로 갔다.

나와 동행한 지인 앞에 내놓으신 말씀은 놀라운 내용이었다.

 

「위의 문하생은 본인의 지도 아래 ‘태평무’ 전 과정을 원형대로 이수하였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전통무용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무용인의 한 사람으로서 특별히 끊이지 않고 ‘태평무’를 전수시키는 사명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기록은 본인이 계승, 전수해 온 ‘태평무’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다하였음을 알리는 것이며 꼭 같은 책임이 위 문하생에게 지워지게 된 것을 만인에게 알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선생께선 1983년 ‘발탈’로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셨다.

발탈이 중요무형문화재 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재인청 ‘태평무’도 함께 심의 대상에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태평무는 지정되지 못하고 발탈이 지정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춤꾼이니 발탈로는 받지 않겠다” 버티셨다. 어렵사리 연구보고서를 올렸던 전문위원이 선생께서 안 하시면 발탈이 끊긴다는 말에 설득되고 만다.

 

이게 화근이었다. 나는 춤꾼이지 발탈 재주꾼이 아니라는 하소연을 입에 달고 사셨던 선생께선 ‘전통춤의 산 증인’으로 불리기를 원하셨다. 때론 남사당패를 따라 줄타기를 배웠던 이력으로 선생을 일러 ‘마지막 남사당’이라 부를 땐,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분한 어조로 말하곤 하셨다. 물론 창, 재담, 춤 등이 한데 어우러진 발탈은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잘 드러난 종합 가무극으로 국문학적 자료로도 소중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어처구니없게도 본말이 전도되어 춤꾼 이동안의 가치를 놓쳐버리는 요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수자, 전수자를 내는 것은 국가나 도지정 예능보유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여서 굳이 내게 태평무 이수증을 주려 하신 뜻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수증의 내용을 보면 선생께서 생애 전반을 통해 지니셨던 재인청 춤에 대한 역사적 소명과 지향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 말이다. 내용을 받아쓴 지인도 숙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공식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이 ‘태평무 이수증’을 사랑한다. 나는 복받치는 설움과 함께 재인청 춤의 계승자라는 책무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태평무 이수증 이후로 선생님의 가르침은 마치 폭포수와도 같았다.

선생께선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계셨던 것이 틀림없다.

태평무가 슬로우푸드라면 진쇠춤과 엇중몰이신칼대신무는 패스트푸드였다.

아니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였다는 게 더 정확할 듯싶다.

 

태평무를 익히기 위해서는 필히 익혀야 한다고 가르치신 팔박기본무는 새로운 모든 춤 앞에서 마치 에필로그처럼 추어야 했다.

그리고 재인청 춤 중, 가장 화려하고 역동적인 진쇠춤은 그 역동성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선생께선 무언가에 쫓기고 계셨다. 서대문 연습실을 작파하고 주거지를 수원으로 옮기시면서 화령전을 연습실로 부르셨다. 종내에는 입원하신 병원까지 나를 부르셨다.

그렇게 익힌 ‘엇중몰이신칼대신무’가 선생의 상여를 보내드리는 춤이 될 줄이야.

 

 

나는 안다.

태평무를 제대로 추어야 나머지 춤들을 허락하기로 하셨던 것을. 어쩌면 전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애태우셨음을. 마지막 남은 하나의 숨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쏟아주신 선생의 사랑을 가슴 시리도록 안다.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선생께서 부어주신 모든 것을 담으려 했다.

나 역시 혼신을 다해야 보답이 된다고 채찍질을 했다. ‘이동안의 춤세계 연구’가 그렇게 나왔다.

 

석사학위 논문을 들고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선생께선 생전에 나를 부를 때, 이름대신 ‘앙금채’로 부르셨다. 우짖는 새소리가 “앙금채야 앙금채야”로 들리는데, 어찌 들으면 선생의 소탈한 웃음소리도 섞인 듯, 참 잘했다 반기신다.

 

 

선생께선 당신의 춤 이수와 관련하여 생애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 이수증을 필자에게 수여하셨다. 잘 살펴보면 선생의 확고한 마음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직인과 도장으로도 마음이 쓰였는지 자필 글씨와 함께 지장까지 남기셨다. 이를 넘어서는 마음의 표현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힘이 들 때마다 이 자필과 지장을 통해 늘 나의 춤길을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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