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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연기처럼 사라지는 노래를 우리 곁에 붙잡아 둔 청구영언(靑丘永言)

 

연기처럼 사라지는 노래를 우리 곁에 붙잡아 둔 청구영언(靑丘永言)

 

시를 노래하다


일본에는 하이쿠라는 전통시가 있다. 하이쿠는 형식상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로 알려져 있다. 짧은 문장으로 긴 여운을 만드는 이 시 형식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문학교육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어 일본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 하이쿠를 교육의 소재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경험이 있었고 그 과거사에 대한 정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마당에, 교육 현장에서 일본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노래다. 하이쿠는 일본의 단가로 형식상으론 세계에서 가장 짧은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하이쿠에 비견할만한 시가 없을까?

 

우리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느린 노래라고 부를 만한 장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가곡(歌曲)이다. 가곡이라 하면 홍난파의 <봉선화>같은 노래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가곡은 독일이나 이탈리아 가곡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서양음악의 한 장르이다. 그보다 앞서 우리에게는 오랜 전통을 지닌 가곡이 있었다.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삶의 정서를 나누며 읊조리던 노래는 시조(時調)였다. 시조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형시로 간결한 형식 속에 섬세한 감성과 운율미를 담아낸 노래이기도 했다.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인 고려 말, 이방원이 부른 <하여가>에 정몽주가 <단심가>로 화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시조는 오랜 역사적 뿌리를 지닌다. 이런 시조를 노래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장르는 조선 후기 유행한 시조창이 있고 그보다 앞선 시기부터 양반 계층 사이에서 우아한 성악으로 사랑받던 가곡(歌曲)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노래 가곡(歌曲)

 

가곡은 판소리, 범패와 함께 우리 음악의 3대 성악 장르로 꼽는 국가무형유산이며,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정가(正歌) 예술이다. 정가는 조선의 선비들이 즐기던 성악으로 가곡, 가사, 시조(시조창)를 아우르는 장르를 말한다. 정가라는 명칭은 아정(雅正)한 노래라는 뜻으로 우아하고 반듯한 품위를 지닌 노래의 성격을 말해준다.

 

이 가운데 가곡은 음악적 아름다움이 극에 달해, 그 반주만 따로 떼어 〈자진한잎〉이라는 기악 연주곡으로 독립된 장르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자진한잎〉은 일제강점기 우리 궁중음악을 전승하고 지켜내던 이왕직아악부가 이습회(肄習會)라는 연주회에서 〈경풍년(慶豊年)〉·〈염양춘(艶陽春)〉·〈수룡음(水龍吟)〉 등 우아한 아명(雅名)으로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 선율을 대금이나 단소로 연주한 곡은 〈청성곡〉 혹은 〈청성자진한잎〉이라 부른다.

 

가곡은 초장, 중장, 종장 3장의 형식의 시조를 다섯 단락(5장)으로 구분하여 노래하는데, 세 번째 단락(3장) 다음에는 ‘중여음’이라고 하여 간주(間奏)를 연주하고, 마지막 단락(5장) 다음에는 ‘대여음’이라 하여 후주(後奏)를 기악으로만 연주한다. 이런 형식으로 노래하는 가곡은 빠르기에 따라 〈만대엽(慢大葉)〉, 〈중대엽(中大葉)〉, 〈삭대엽(數大葉)〉 등 세 종류가 있었다.

 

한자 數는 흔히 ‘수’라고 읽지만, 빠르다는 의미로 쓰일 때는 ‘삭’으로 읽으며 특히 가곡에서는 빠르다는 의미로 〈초삭대엽〉, 〈이삭대엽〉, 〈삼삭대엽〉 등으로 곡명에 쓰였다. (초수대엽, 이수대엽, 삼수대엽 등으로 칭하기도 함)

 

그런데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악보집에는 <만대엽>만, 중기의 악보집에는 <중대엽>, 후기에는 <삭대엽>의 악보가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빠른 음악을 좋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삭대엽>과 그 파생곡들만 전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은 그의 백과사전적 저술인 『성호사설』에서 <만대엽>은 너무 느려서 사람들이 싫어하여 폐지된 지 오래이고, <중대엽>은 약간 빠르긴 하나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지금 통용되고 있는 것은 <삭대엽>이라는 곡조이다.’라고 이러한 세태를 기록한 바 있다.

 


<우조(羽調) 이삭대엽(貳數大葉) '버들은' https://link24.kr/8Iw6O8t>


그런데 조선시대에 빠르다고 했던 〈삭대엽〉 중 현재에도 연주되고 있는 〈이삭대엽〉이라는 곡의 빠르기는 메트로놈의 분당 박자 수(BPM)로 계산했을 때 20BPM 안팎 정도이다. 이는 서양음악에서 가장 느린 템포인 Grave(그라베)가 40BPM 임을 감안했을 때 그보다도 2배가량이나 느리다. 가히 세상에서 가장 느린 노래라 칭할 만하다. 〈삭대엽〉이 이 정도라면 과연 <만대엽>은 얼마나 느렸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느린 곡을 좋아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 우리 가곡은 음악적으로 아름다운 걸작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느린 노래라는 점에서도 아주 특별하다.

 

삭대엽(數大葉)의 순우리말 이름은 ‘자진한잎’이다. ‘자진’은 빠르다는 의미로 한자 삭(數), ‘한잎’은 큰 이파리라는 뜻으로 한자 대엽(大葉)이다. 노래를 이파리로 표현하다니 조선 선비들의 풍류,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가곡을 한 곡 청하며 “여보시게 노래 한잎 띄워보시게~”라며 말을 건넸을 그들의 멋스러움을 상상하니 하염없는 미소가 입가를 떠나질 않는다.


가장 오랜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

 

조선의 유학자들은 건국 명분과 새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고려사』를 편찬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 시대 음악을 「악지(樂志)」에 정리하였는데 궁중악뿐 아니라 일부 민간 노래도 포함되었지만, 정작 우리말로 된 가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고려사』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편찬되었지만, 우리말로 된 가사는 속된 언어로 표현된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사리부재(詞俚不載)’라는 원칙을 앞세워 기록하지 않았다. 한글을 속된 이어(俚語)로 취급하던 선비들의 태도는 비록 그들 스스로 우리말 시조를 즐겼음에도 그 시가 한글로 기록되는 시기를 늦추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 전란을 겪은 이후 조선 사회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한 사회 구조의 동요 속에서 시장경제가 점차 형성되었고, 그 과정에서 중인 계층인 상인들이 경제적 부를 축적하며 새로운 사회 주체로 부상하게 되었다. 또한 전란(戰亂) 기간 동안 궁중을 떠나있던 악사(樂士)들이 전쟁 이후에도 복귀하지 않고 지방에 정착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점차 민간에서의 음악 활동이 활발해진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음악과 예술을 사랑한 양반 계층, 그들과 어울리며 신분 상승의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던 중인 그리고 전문 예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풍류방(風流房)’ 문화가 형성된다.

 

이 풍류방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친 가객(歌客)이 있었으니, 바로 김천택이다. 그는 중인인 포교(포도부장) 신분으로, 오늘날로 치면 경찰 간부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시경(詩經)』 300편을 늙도록 외울 만큼 학문적 소양도 깊었고, 노래 실력 또한 조선 제일이라 불릴 만큼 뛰어났다. 김천택은 본인이 지은 57수를 포함하여 당대 가객들이 즐겨 노래하던 580수의 시를 우리글로 정리하여 엮었는데, 그것이 1728년(영조 4)에 편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최초의 한글 시가집(詩歌集)인 『청구영언(靑丘永言)』이다.

 

『청구영언』이라는 책 제목을 살펴보면, ‘청구(靑丘)’는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세계관 속에서 조선을 지칭하던 표현이었다. 청(靑)은 동쪽을 상징하는 색이고 구(丘)는 작은 언덕을 뜻하는 한자어로 조선을 '동쪽의 작은 나라'로 인식했던 사대부(士大夫)들의 사대(事大) 의식이 반영된 단어이다. 영언(永言)은 노래를 뜻하는 단어로 『청구영언』은 책 제목에 조선의 노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청구영언』과 함께 조선 3대 가집으로 꼽히는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의 책 제목을 보아 가곡(歌曲)은 가요(歌謠), 영언(永言) 등으로도 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친일 성향의 역사관에 물든 학자들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한글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한글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부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 후기 풍류방에서 향유되던 가곡의 노랫말은 한글로 기록되어 널리 유통되었으며, 이는 한글이 예술과 일상 문화 속에서 활발히 사용되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앞서 언급한 3대 가집 외에도 제주목사로 유명한 병와(甁窩) 이형상이 엮은 『악학습령』을 비롯하여 『고금가곡』, 『근화악부』, 『남훈태평가』 등 다양한 한글 가집(歌集)들의 존재 했다. 이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에 오기 이전부터 한글이 기록 수단으로 활발히 활용되었음을 뚜렷하게 증거하고 있다.


진본(眞本)을 찾아 국립 한글박물관으로

 

청구영언은 그 존재가 갖는 의미가 크기에 수많은 이본(異本)이 존재한다. 1766년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균관의 존경각본(尊經閣本), 적어도 1742년 이전에는 발간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장서각본(藏書閣本), 서울대 규장각 가람문고에 보관 중인 가람본, 일본 도쿄대학에 소장된 오쿠라본(小倉本), 이한진이 1815년에 자필로 쓴 책을 1961년 한국어학회가 발간한 연민본(淵民本) 그리고 6·25전쟁 때 소실된 최남선의 육당본(六堂本) 등이 있다. 이본은 엮은이가 지은 시나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추가하였기에 진본보다는 더 많은 작품을 담고 있다.

 

육당본이 나온 김에 최남선에 대해 거론하고 다시 본론으로 가고자 한다. 다들 잘 아시는 이야기지만, 최남선은 일제강점기 변절한 지식인의 대표이다.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기도 하였고 단재 신채호와 함께 한국사 서술의 자주적 관점을 고민하고 독립운동가들과도 교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는 글들을 다수 발표하며 변절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반민족적 행위를 〚친일인명사전〛에 박제하여 역사의 이름으로 심판하였다.

 

한글박물관 상설전시장에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훈민정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조선 최고 가객 김천택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청구영언’ 진본은 과연 존재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 진귀한 유물은 300년의 세월을 꿋꿋이 버텨내고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다. 필자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립 한글박물관에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한달음에 찾아갔다. 워낙 목표 의식이 뚜렷한 성격이라 박물관 1층은 살피지도 않고 2층 전시실로 바삐 직진하였다. 그러나 그런 나의 바쁜 걸음은 주춤댈 수밖에 없었다. 상설전시장 입구를 지나자, 한글 창제의 장엄한 의미가 신비한 음악과 함께 드라마틱하게 연출되었고 나의 호흡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전시실 코너를 돌며 마주한 오랜 기록들에 나의 동공은 점점 커져만 갔다. 급기야 노비에게 붓으로 멋지게 써 내린 양반의 편지를 마주한 순간 그 내용이 주는 웃음 너머로 감격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아 위대한 세종이시여~

 

양반이 노비에게 밀린 도지를 갚으라며 쓴 편지

 

한때 입에서 불리고 후세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노래여~

 

중인 신분인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편찬하면서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상류사회에 편입하고자 했던 열망을 투영하였다. 그 열망은 발문(跋文)을 작성해 준 인물로 이정섭을 택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정섭은 선조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의 후손으로 18세기 전반기 문학비평 활동을 활발히 펼친 인물이었다. 특히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던 조귀명의 작품을 비평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왕실의 종친이자 문학 비평가인 이정섭이 저자의 음악성을 발문을 통해 찬미하였으니 이 저서가 지닌 정통성과 권위는 얼마나 특별했겠는가.

 

서문(序文)을 맡은 이는 정래교(鄭來僑)였다. 조선 후기 중인이나 평민 등 양반 계층이 아닌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 했는데, 정래교는 문장력이 탁월하여 당대 여항문학의 핵심 인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 역시 중인 출신으로, 최고의 예술가로 명성을 떨쳤으니, 김천택의 음악관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김천택은 자신이 노랫말을 한데 모은 이유에 대해 발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그 의중을 시처럼 표현하였다. ‘한때 입에서 불리고 자연히 사라져, 후세에 연기처럼 흩어지는 처지를 면치 못하는...’

 

그의 염원대로 그가 부른 노래는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300년이 흐른 지금까지 보전되었다. 가장 오래된 한글 가집인 그의 역작(力作) 『청구영언』은 과 우리 문학의 정수로 꼽는 시조 문학의 존재와 당대 가곡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음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가 되었다.

 

김천택의 청구영언 진본


『청구영언』 진본에는 580수의 시가 실려있다. 이 시를 시대순으로 구분하고, 작자 미상은 주제별로 구분하며, 곡조에 따라서도 구분하는 등 그 구성을 치밀하게 짜고 있다.
책의 시작은 정래교(鄭來僑)의 서문(序文)이다. 다음은 중대엽(中大葉)의 첫 곡이며 만대엽(萬大葉)의 대표곡으로도 전해지던 초중대엽(初中大葉) <행운유수(行雲流水)>에 이어, 이중대엽(二中大葉), 삼중대엽(三中大葉)이 각 1수씩 기록되고, 고려 시대부터 불린 성악곡 북전(北殿), 북전을 변주한 이북전(二北殿), 고려 시대 임금 행차 시 음악이던 황풍악(皇風樂)을 계승하여 황진이(黃眞伊)가 지었다는 초삭대엽(初數大葉)이 각 1수씩 수록된다.


이어서 이삭대엽(二數大葉)에는 고려말 작품 6수, 조선 초 작가 41명의 작품 203수, 태종(太宗)·효종(孝宗)·숙종(肅宗)의 작품 5수, 본인의 작품 57수를 포함한 여항(閭巷) 6인의 작품 65수, 황진이(黃眞伊)·소백주(小白珠)·매화(梅花) 3인의 작품 5수가 포함된다. 다음으로 삼삭대엽(三數大葉) 55수, 낙시조(樂時調) 55수,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설시조(辭說時調)인 장진주사(將進酒辭) 1수, 작자 미상의 가사(歌辭)인 맹상군가(孟嘗君歌) 1수, 사설시조인 만횡청류(蔓橫淸類) 116수가 차례로 수록되며, 마지막은 마악노초(麻岳老樵) 이정섭(李廷燮)의 발문(跋文)으로 끝을 맺는다.

 

책의 구성을 보면 김천택이 집필하던 당대 가곡의 흐름과 유행에 대해 유추가 가능하다. 책의 전반부에 수록된 작품을 보아 <중대엽>이 이 시기에도 여전히 불렸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삭대엽>의 수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는 그 유행이 대단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시의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낙시조(樂時調)나 사설시조가 담긴 것으로 보아서, 시조보다 많은 가사를 노래 부르기 위해서는 <삭대엽>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사설을 엮어가며 노래했을 것이라는 점도 유추할 수 있다.

 

시조는 우리 문학의 정수로 꼽는다. 본 칼럼을 통해 그간 시조를 국문학적 가치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확장하여, 노래로서의 미학적 아름다움에도 눈을 떠 더욱더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참고자료>
김혜리·김여운, 『가곡』, 민속원, 2009.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14.
문주석, 『풍류방과 조선후기 음악론 연구』, 도서출판 지성인, 2011
임수철, 세계에서 가장 느린 노래 전통 가곡, 『새가정』 1994년 11월호(통권 451호), 116~117쪽
성기련, 「<중대엽>과 <삭대엽>의 향유 양상 비교 연구」, 『국악교육』 제44집, 국립국악원, 2021, 179~216쪽.
권순회외, 청구영언 장서각본, 한국중앙연구원출판부, 2021.
신자료, 존경각 소장 30장본 『靑丘咏言』의 편찬년대와 편찬자 고찰,강혜정, 한국문화학회, 2017.
경남신문 2017.1.3. (http://m.knnews.co.kr/mView.php?idxno=1202037&gub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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