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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취재] “유파 폐지? 전통의 다양성 말살이다”… 무형유산 정책에 학계·현장 공동 우려

“유파 폐지는 행정 편의주의이자 예술 생태계의 붕괴”
“전설로 전통을 왜곡한 행정… 유령과 망령의 판단”
“기성세대의 책임, 젊은 전승자들의 미래를 위하여”

 

“유파 폐지? 전통의 다양성 말살이다”… 무형유산 정책에 학계·현장 공동 우려

 

지난 6월 28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가의집 다목적홀에서 열린 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는 국가유산청의 ‘유파 폐지 방침’에 대해 학계와 전통예술 현장이 공동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행사는 유대영 교수(고려대)와 채치성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장의 사회와 좌장인 김승국 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의 진행 아래, ▲손태도(전 호서대 교수) ▲최동현(군산대 명예교수) ▲하응백(이북5도무형유산위원장) ▲김현숙(진도예술영재교육원)이 발표를 했고, ▲김문성(국악평론가) ▲정병헌(전 숙명여대 교수) ▲김정희(전주대 연구 교수) ▲윤아영(백석예대 교수)이 토론자로 참여했고 ▲성기숙(한예종 교수), ▲고향임(한국판소리보존회 이사장)이 격려사와 축사를 했다.

 

“유파 폐지는 행정 편의주의이자 예술 생태계의 붕괴”

 

김문성 국악평론가는 “유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통예술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것”이라며 “국가무형유산 제도가 행정 편의주의에 기반해 운용되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손태도 교수 역시 “문화재청이 의뢰한 유파 폐지 관련 연구 용역 결과가 학문적 검증도, 현장 수용도 받지 못하고 있음은 제도의 실패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동현 교수는 "판소리 유파에 관한 문제는 국가유산청이 독점하여 주도해서는 안 된다. 민속음악의 전승체계를 행정적으로만 정리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민속음악의 전승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공동체의 선택’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국가유산청의 행정 중심의 일처리를 비판하였다.

 

“전설로 전통을 왜곡한 행정… 유령과 망령의 판단”

 

하응백 평론가는 더욱 날카로운 논조로 “이창배의 ‘부벽루에서 놀량과 산타령을 들은 서도명창이 놀량을 흉내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전설”이라며, “33년 후 그 전설이 국가의 공식 보고서에 그대로 복제됐다는 것은 ‘망령’이 행정을 지배한 증거”라고 꼬집었다.

 

그는 경기민요와 서도민요의 전통을 무리하게 통합하여 하나의 종목으로 관리하는 방식은 현실을 무시한 비상식적 판단이라며, “놀량사거리라는 고유 명칭으로 변경한 뒤, 경기놀량과 서도놀량을 별도 종목으로 이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희 교수는 김정연·한명순의 <놀량사거리>가 사당패소리의 특징과 서도소리의 요성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이창배·황용주 계열의 <놀량사거리>와는 음악적으로 명확히 구분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서도의 놀량사거리는 독립 종목으로 인정받아야 하며, 이 기준 없이 행해지는 현재의 무형유산 심사는 불합리하다”고 진단했다.

 

“기성세대의 책임, 젊은 전승자들의 미래를 위하여”

 

좌장을 맡은 김승국 원장은 마무리 발언에서 "국가유산청이 기존에 의뢰한 유파 폐지 관련 연구 용역 결과가 학계와 현장에서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원점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하면서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추가 인정에 있어서도 김금숙, 김장순, 김영임 선생과 같은 전승교육사들이 전승교육사 신분으로만 25~35년을 보내게 했다는 것은 국가유산청의 직무유기이자 전승자에 대한 행정적 폭력이다.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추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질타하였다. 그리고 "미래를 책임질 젊은 전승자들이 자존감을 갖고 건강한 생태계 안에서 자부심을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국가유산청과 기성세대와 원로들이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북5도 무형유산위원으로 활동 중인 유대용 교수는 국악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경기선소리와 서도선소리는 단순한 유파 차원을 넘어, 각각 별도의 종목 지정이 가능할 만큼 명확히 구분되는 전통"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서울잡가 역시 경기민요, 휘모리잡가, 잡잡가로 확연히 나뉘는 세 갈래의 전통을 '서울잡가'라는 하나의 종목으로 통합 지정한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결정이며, 이 세 종목을 한 명의 보유자가 모두 전승하는 것은 문화적으로나 제도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차후 재지정이 이뤄진다면, 서울잡가를 ‘가’, ‘나’, ‘다’형 구분으로 나눠 각각의 계열인 경기민요, 휘모리잡가, 잡잡가로 분리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이날 현장에서는 경기소리 고 김옥심 명창의 수제자이자 84세의 고령에도 무대에 선 남혜숙 선생이 <잡잡가> 시연을 선보여 큰 감동을 주었다. 그의 깊은 호흡과 절창은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며 전승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남혜숙 선생의 잡잡가 시연

 

이번 학술대회에서 제기된 유파 폐지 정책의 문제는 이미 국악타임즈가 지난 2년간 집중적으로 다뤄온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특히 경기민요의 경우, 안비취·묵계월·이은주 유파로 뚜렷하게 구분되며 오랜 전승 계보를 이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화재청이 이를 부정하고 단일화하려 했던 시도가 현장의 강한 반발을 불러온 바 있다.

 

국악타임즈는 당시 “유파는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전통의 정체성과 전승 체계의 핵심”이라며 국가유산청의 입장을 조목조목 반박했고, 이는 국악인 1만여 명의 탄원서 제출과 시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학술대회는 단순한 학문적 토론을 넘어 국악 현장에서 벌어졌던 실제 갈등과 제도적 부조리를 성찰하는 장이었으며, “유령과 망령”이라는 표현 속에는 문화정책의 왜곡된 방향에 대한 예술계의 분노와 절박함이 담겨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현실을 외면한 제도 운영이 아니라, 유파별 전승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합리적이고 공정한 무형유산 보존 정책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국가 무형문화유산 제도 전체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되묻는 자리였다. 행정 중심의 기준이 아닌, 전통의 진정성과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제도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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