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기획연재 13]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기획연재 13] 재인청 춤꾼 이동안 - 수난의 시대를 살다 간 한 춤꾼의 포괄적인 초상

 

살다보니 1

 

마지막 여인

 

남사당패를 따라 가출을 감행한 아들을 찾아내 집으로 데려온 아비는 강제로 혼인을 치르게 했다. 그마저도 뿌리치고 신방을 꾸린지 나흘 만에 야반도주해버린 아들! 그때 그 아내는 어찌 되었을까? 슬하에 자식 하나 만들 시간이 없었던 아내는 고작 나흘의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1924년이었을 거야. 아마!” 우연히 아내를 만난 선생은 그제야 남편이 되어 아내로 맞은 것이다.

 

역마살은 불치병이다. 고칠 수 없었던 선생은 고작 3년을 붙어살다가 까맣게 잊었던 아내의 소식을 동족상잔의 전쟁통 속에서 포격으로 사망했다는 기별로 듣게 된다. “참 미안했지. 고향을 지키면서 농사짓고 살려고 했지. 마누라랑 아들딸 낳고 살기로 했거든. 그런데 안 되더라구. 늘 답답하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었거든. 그게 내 피였어. 그러니 어쩌겠어. 떠나야지.” 춤꾼의 언어가 아닌 평범하고자 했던 평범한 한 사내의 처음이자 마지막 한탄과 회한의 목소리였다.

 

사실, 선생은 외모로 여성의 마음을 훔치기에는 너무나 평범했다. 그런데 무대의 선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춤을 추는 이동안이라는 사내는 멋이 줄줄 흘러넘쳤다. 한 번 이 멋에 매료된 여성들은 선생이 무대 아래로 내려와도 매력덩어리로 생각하였다. 게다가 막 마친 춤 이야기를 펼치다 보면 반짝이는 위트와 신념에 꽉 찬 광대의 모습에는 카리스마까지 번뜩였으니 눈에 씐 콩깍지가 벗겨질 겨를이 없었다 한다.

 

광무대를 비롯 원각사, 문락정을 돌며 인기가 치솟고 있던 시절, 장안의 기생들이 다투어 모시려 했던 선망 내지는 정복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한 기생에 기회가 온 모양이었다. 무슨 사내가 온갖 아양과 구애에도 눈길도 주지 않더라는 얘기. 그래서 이런 원망의 에피소드가 웃음과 함께 장안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따로 보자 매달려도 대꾸조차 안 하더라. 잔뜩 멋만 든 주제에!’

 

그런 어느 날, “내 팔자에 무슨!” 했던 여생을 함께 하게 되는 배필이 선생의 교습소로 찾아오게 된다. 당시 그 배필은 50대였고 선생은 칠십을 막 넘어서고 있었는데, 장구를 배우러 왔다는 여인에게 선생은 다짜고짜 무용실 한가운데 서보라 하고는 장구채를 잡았다. 팔을 들어보라 하더니 ‘딱’하고 한 장단을 치더란다. 이어 이르기를, “춤이 다 되어버렸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춤 공부였다 한다. 그날 이후로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교습소를 찾게 되더란다.

 

이분이 선생의 마지막 날까지 함께 동행한 안남국 여사다. 강원도 양반가 출신으로 단아한 품격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정갈한 바느질 솜씨, 깔끔하고 맛깔스런 요리 솜씨로 선생을 모셨다. 선생께서 기어코 눈을 감아 염을 행하는데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 맑고 깨끗한지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그윽이 바라보는데 미소를 지으시더란다.

 

여사는 선생께서 떠나신 이후에도 수원의 우거를 지키셨다. 어찌 사시는지 명절을 찾아 좋은 먹거리라도 들고 찾아뵈면 이동안 선생이 살아오신 것 같다고 기뻐하시는데 여사께선 선생의 흔적들을 꼼꼼이 정리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장구를 배우면서 본인의 소유로 지녔던 장구채도 챙기고 선생의 유품을 하나라도 내게 건네주려고 그 깊은 다락방을 뒤지곤 하셨다. 궁핍한 생활에도 들고 간 것보다 들려주는 것이 더 많았던 여사님과의 교류는 그렇게 20년을 더 이어갔다.

 

여사께서 마실 차 다니시던 노인정의 공연을 위해 논의도 할 겸, 전화를 드렸더니 받지를 않으신다. 바쁘시겠거니 한참을 기다려도 전화가 없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찾았더니 전날 돌아가셨다는 거다. 우리 회원과 함께 장례식장을 찾았다. 유가족 모두가 바깥까지 나와 정중히 예를 표하는데 여사께선 내 이야기를 함께 공유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선생께선 교습소를 찾아온 여사님을 어찌 한눈에 알아보았을까? 곁에 여사가 계셔 모시지 않았다면, 내가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재인청 춤 전승의 사명을 맡을 수 있었을까? 지금쯤 선생께선 이승에서의 마지막 여인을 저승의 첫 여인으로 만나 여사의 어깨를 토닥이고 계시리라.

 

 

 

흔히 자유로운 삶이라고는 하지만 스스로의 고백에 따르면 선생의 생애는 전형적인 부초의 삶이었다. 비록 길지는 않았으나 이런 삶을 멈추게 한 것은 선생의 춤을 사랑한 팬덤과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헌신이 있었던 까닭이다. 운학회(운학 이동안 선생의 춤을 이어가는 단체)가 전적으로 선생의 춤에 집중했다면 수원에 정착하여 여생을 마감하게 한 힘은 안남국 여사의 지극한 인간애였다. 장단과 춤을 배우기 위해 찾았던 연구소에서 그녀가 만난 것은 사람이었다. 찾아가자마자 “팔 한 번 들어보라”더니 “춤이 다 되었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은 자신의 여생을 맡길 운명의 배우자였음을 직감하셨던 것은 아닐까? 선생의 영면 후에도 필자의 공연에 빠지지 않고 찾으셨던 안 여사의 장구채가 내 손에 있는 것은 또 왜일까?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