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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문화예술교육 한마디] 모두가 갑(甲)이고자 하는 사회가 만든 슬픔

 

모두가 갑(甲)이고자 하는 사회가 만든 슬픔


한성여중 교사 최은서


또 한 명의 교사가 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2023년 서이초 사건 이후 교권 침해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지만,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에도 근본적인 변화는 요원하다. 교사들은 폭력적인 학부모 민원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응하여 교권을 보호하는 행정 시스템 구축을 요구하였으나 학교는 여전히 대책 없이 방치된 상황이다. 교권은 교사가 교육활동을 두려움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교사로 살아가는 하루는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다.

 

아침부터 술이 잔뜩 취한 채 교무실 문을 열고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들어오는 학부모의 모습, 내 아이만을 향한 특별대우를 강요하는 무고성 아동학대 신고 협박 등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는 교사들의 이야기는 이미 주변에 차고도 넘친다. 인근 학교의 한 남교사가 성추행 혐의로 신고를 당한 뒤, 결국 무죄임이 드러나 교단으로 되돌아오기까지 무려 2년을 견뎌야 했다는 이야기는 여학교에 남교사로 근무 중인 나에게 가끔씩 큰 불안감으로 다가오곤 한다. 이런 일들이 2025년 대한민국 교사 그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에 많은 교사들의 마음은 교단 밖으로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란 말이 있기는 했던가...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같다는 의미로 군사부일체라 했다. 그 단어의 무게만큼 유교 사상의 근간이 사회적 통념에 어느 정도잔존 하던 시절까지는 교직은 성직처럼 존중되었다. 일부의 일이긴 하지만, 촌지와 비인격적 체벌 등의 잘못된 관행이 지적되기도 하였지만, 부조리가 팽배했던 과거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나마 바르게 양심을 지키는 다수의 교사가 있었기에 그 시절에도 교직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추락하진 않았다.

 

세상에 쏟아지는 수많은 학창 시절의 회고담은 아름답게 추억되기보다는, 불합리하고 부당했던 기억을 자극적으로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다. 기억이라는 장치의 특성상 강한 자극을 동반한 상처일수록 더 오래 남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학창 시절을 보냈고 그 시절 경험했을 법한 한두 가지 불쾌한 기억이 눈덩이처럼 축적되며, 학교는 본디 불쾌한 장소인 것처럼 인식되기 쉬웠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기억을 품은 이들이 학부모가 되었다.

 

전교조의 학교문화 운동으로 이미 촌지와 체벌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일부 학부모들은 마치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억울함을 이제야 풀겠다는 듯, 학교 사회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며 교사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사회는 변하였고, 새로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교사들에게 과거의 책임까지 묻는 것은 온당치 않다.

 

모두가 양반이 된 사회, 모두 대졸자가 되기로 했다.

 

서구 유럽의 봉건적 신분 질서는 시민혁명을 통해 해체되었다. 세습 특권을 지닌 귀족 사회는 점차 무력화되었고, 아래로부터의 혁명과 제도 개혁을 통해 법적‧사회적 평등을 기반으로 한 시민 권리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 과정은 다소 독특했다. 조선 후기 갑오개혁을 통해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노비와 평민이 양반 족보를 매입하거나 스스로 양반이라 주장하는 현상이 확산되었고, 마침내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양반을 자처하면서 신분 질서는 사실상 해체된다.

 

모두가 ‘양반’이 된 사회는 신분적 상하 구분이 사라진 듯 보이지만, 무시당하는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결국은 ‘갑(甲)’의 위치에 서려는 새로운 형태의 욕망을 낳는다. 식민지 시기에는 친일파들이 ‘갑’의 지위를 확보하여 패악질을 저질렀고, 해방 이후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아래에서는 자본과 재화를 통해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가 확산되며, ‘갑질’이란 단어로 특화되는 문화가 퍼져나간다. 조선시대를 관통하던 검소, 겸손, 겸양의 선비정신도 서구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고상한 도덕의식도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는 자리잡지 못하고 갑의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천박한 욕망만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모 대통령 후보가 과거 119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나 경기도지사인데”라며 위계적 언사를 내뱉고, 코로나 시국에 경찰에게 “내가 국회의원을 세 번이나 했어.”라고 압박하듯 말하던 장면은 갑질의 문화가 우리 사회 깊숙이 구조화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다.

 

교사가 존중받던 사회의식의 근간에는 유교적 전통뿐만 아니라, 대학을 졸업한 배운 사람이 드물었던 시절에 형성된 지식인에 대한 경외심도 작용했다. 갑은 못 되더라도 을은 면하고자 했던 우리 부모 세대는 자식의 ‘가방끈’을 길게 해주기 위해 삶 전체를 교육에 바쳤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사회는 국민 대다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학 졸업자를 가진 학력 과잉 사회가 되었다. 학력 과잉이 비판받기도 하지만, 우리 부모 세대에게는 “대학만 나와도 을의 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자식에게 그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 최소한의 부모 역할이라 여겼다. 그러니 이제 ‘교사가 배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기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교사라서 존중받던 사회에서 직업의 귀천 없이 모두가 존중되는 사회로

 

우리 사회는 교사뿐 아니라 어떠한 직업군도 그 직업 자체만으로는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는 듯하다. 좋은 직업이라 불리는 의사도, 판검사도, 공무원도 모두가 ‘양반’이고 모두가 대졸자인 사회에서, “내가 운이 나빠 이 모양이지, 나도 돈 많은 부모를 만났다면 네 까짓거 별거 아니야.”라는 인식을 언제든지 발현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이런 척박한 사회에서 큰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양반이 되고 대졸자가 되는 현상은, 결국 상대를 무시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탈출구에 불과하다. 모두가 갑이 되어 을을 눌러야 안심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의 지위를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큰 병폐이자 교육개혁의 핵심 과제는 대학 서열화에서 비롯된 입시 문제다. 이것 역시 위계적 직업 관념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공립대학 통합 모집과 같은 아이디어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졸자와 고졸자 간의 차별이 해소되지 않는 한, 근본적인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입시 문제의 본질은, ‘좋은 직업’과 ‘그렇지 않은 직업’을 나누고 그에 따라 월급과 사회적 대우가 결정되는, 직업의 귀천을 내포한 구조 자체에 있다. 이 구조를 바꾸는 데서부터 진정한 해법이 시작된다.

 

이는 단지 이상적인 상상이 아니다. 이미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모든 직업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 시스템을 현실화했다. 변호사든 배관공이든 의식적인 평등을 넘어서, 임금 수준에서도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하고 있다.

 


자신의 진로 체험 경험을 이야기 나누는 덴마크 학생들

 

2019년 방문한 덴마크의 한 자유학교(프리스콜레)는 마침 학생들이 1주일간의 진로 체험을 마친 시점이었다. 필자가 인터뷰한 한 학생의 체험 직업은 마트 점원이었다. 그는 부모님의 직업과 같은 일을 직접 체험했고, “적성에 잘 맞는다”며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마트 점원이 되고 싶다고 밝히며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의 진로 체험은 대부분 전문직에 제한되어 있어, 정작 학생들의 부모가 종사하는 직업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실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부모 직업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사회의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와 방향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직업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는 데 있다는 확신이 든다.

 

우리 청년들이 취업을 준비하며 최저시급의 알바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 직업의 귀천이 실제로 없어져 자신의 직업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결혼을 꺼리고, 자녀 출산을 두려워하는 ‘헬조선’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사회야말로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미래가 아닐까.

 

돌아가신 제주 모 중학교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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