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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조선판 태양의 서커스 ‘남사당놀이’

안성의 자랑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남사당패의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조선판 태양의 서커스 남사당놀이
영화 <왕의 남자>의 파이널 샷으로 기억되는 줄타기 ‘어름’
유랑 예인 집단 사당패와 남사당패

 

조선판 태양의 서커스 ‘남사당놀이’


안성의 자랑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오늘은 남사당놀이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국악을 잘 모르는 이들도 그 이름은 들어보았을 만큼 우리의 무형유산 중 대중적인 인기를 크게 누리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풍물놀이뿐만 아니라 줄타기 어름과 우리 전통의 인형극 덜미, 탈놀이인 덧뵈기, 땅에서 재주 넘는 살판, 버나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볼거리가 그득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생동감 넘치는 예술은 1964년 인형극인 덜미를 시작으로 1988년에는 남사당의 여섯 가지 모든 예능 종목이 국가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마침내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라는 세계적인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산하게 안성을 향했다. ‘안성’ 하면 흔히 특정 업체의 라면이 떠오기도 하지만, 필자에게는 늦은 나이에 시작한 국악 공부에 동학들과 도란거리던 캠퍼스로 기억되는 곳이기도 하여 발걸음이 더욱 설레었다. 드디어 안성맞춤 IC에 닿았다. ‘안성맞춤’이라는 표현은 무언가가 꼭 알맞게 딱! 들어맞을 때 쓰는 말이다. 이곳을 오가며 공부하던 시절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말이 바로 이곳 안성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원래 안성은 놋그릇 같은 방짜 유기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동네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주문하면 원하는 모양으로 정확히 물건을 만들어 주었는데 방짜 유기의 경우 그릇과 뚜껑이 똑 맞아떨어지는 기술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안성맞춤’이란 말이 생겨 관용적인 표현이 될 정도였다니 참으로 대단다.

 

오늘의 행사는 지역의 이름에 걸맞게 ‘안성맞춤 바우덕이 남사당 축제’이다. 남사당놀이를 주제로 한 이 축제는 바우덕이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오늘 일정을 서둘러 나선 이유 역시 그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성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우덕이의 사당(祠堂)이었다.


남사당패의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안성 서운면 불당골 산기슭에 들어서자 아담한 사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문이 열린 사당 안에는 오래된 제기들이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마당 한편에 우뚝 선 동상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의 위풍당당함이 느껴졌다.

 

바우덕이 사당

 

바우덕이(1848~1870)는 남사당의 전설적인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대표)로서 조선 후기 안성 남사당패를 전국 으뜸으로 이끈 여걸이다. 구전에 의하면 다섯 살에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남사당패에 맡겨져 성장하면서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의 기예를 익히고 열다섯에는 꼭두쇠로 선출되면서부터 안성 남사당패를 최고의 인기 패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녀의 역사적 순간은 경복궁 중건이란 사건에 맞닿아 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던 시기, 조선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궁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권 회복을 꾀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재산을 보유한 세도가들에게 ‘스스로 내는 돈’이라는 뜻의 원납전(願納錢)을 강제 징수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했던 자금을 메우기 위해 기존 화폐의 100배 가치로 설정된 당백전(當百錢)을 무분별하게 발행하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화폐 가치의 하락은 부유한 세도 가문의 부의 규모를 축소 시키기도 했겠으나, 그보다는 백성과 서민에게 더 큰 피해가 돌아갔다. 위정자들이 벌이는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복궁 중건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의 백성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고된 노역과 식량 부족, 혹서와 혹한이 겹치면서 탈출과 저항이 잇따랐다. 흥선대원군은 단순한 형벌만으로는 이탈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연희패와 예능인들을 불러 지친 노역자들의 고단함을 달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팔도 각지에서 모여든 광대들의 경쟁과 교류는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냈고, 민속 예술 발전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팔도의 아리랑과 여러 민요가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는 점은 이의 증거이다.

 

바야흐로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남사당패를 경복궁 중건 현장으로 불러들였고 이때 바우덕이패는 단연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대원군은 그들의 기예를 크게 칭찬하며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천민 신분이었던 바우덕이에게 종3품 이상의 고위 관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장신구인 옥관자를 하사했다. 그러나 바우덕이는 이를 자신의 이마에 두르지 않고 안성 남사당패의 깃발인 영기(令旗)에 달아서 들고 다녔다. 옥관자가 매달린 영기의 등장은 곧 조선 최고의 남사당패, 바우덕이패의 등장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녀의 화려했던 예인 생활은 안타깝게도 스물세 살의 나이에 폐병으로 막을 내렸다. 바우덕이는 안성 청룡골 입구 개울가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안성남사당 꼭두쇠 바우덕이의 묘


조선판 태양의 서커스 남사당놀이

바우덕이의 삶을 추적하는 여정을 뒤로하고 안성맞춤랜드를 찾았다. 이미 주차장은 자동차로 가득 차 들어가는 진입로부터 혼잡했다. 행사장 이곳저곳 구름처럼 뭉실거리는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서 축제의 열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남사당놀이 공연을 보기 위해 실내 공연장을 향했다. 공연장 매표소를 살펴보니, 사람들로 북적이는 축제 기간이 아니어도 남사당놀이를 상설로 관람할 수 있어 언제고 다시 와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반가웠다.

 

공연장에서는 현재까지 전해져 연행되는 남사당놀이의 여섯 가지 놀이가 펼쳐졌다. 사람의 이동이 많지 않던 전통사회에서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지 않았다. 지루하고 나른했던 시절, 마을을 뒤흔드는 농악 소리와 함께 다양한 기예를 지닌 유랑 예인집단이 찾아오는 일은 가슴을 들뜨게 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인간 능력의 극한을 뛰어넘는 기예를 펼쳐 보이는 그들의 연희장면은 오늘날로 치면 태양의 서커스에 비견할 만한 공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장면들을 하나씩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풍물놀이는 경쾌한 웃다리농악 가락을 연주하며 다채로운 진풀이를 보여준다. 농악은 지역에 따라 가락과 형식이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산지가 많아 농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북한 지역에서는 농악이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않은 점도 특징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농악이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전승되어 온 놀이임을 유추하게 한다. 이에 따라 서울과 충청권의 농악은 ‘웃다리농악’이라 불렸고, 농업이 발달한 전라도는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으로 나뉘었으며, 강원도는 영동농악, 경상도는 영남농악으로 구분되고 있다.

 

남사당놀이의 농악이 특히 볼 만한 것은 다섯 명이 한데 엉겨 만드는 무동놀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면 남사당이 최고의 기예를 지닌 집단으로 불린 이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일곱 명이 무동을 만들었던 기록도 남아 있어, 공연장 앞마당에는 동상을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풍물 외에도 덜미, 살판, 덧뵈기, 줄타기 등의 놀이가 있다. 이 중 ‘덜미’는 우리 전통의 인형극으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인형의 목덜미를 손으로 잡고 연기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생겼다.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따라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이, 홍동지놀이 등으로도 불리기도 했다. 내용은 매우 해학적이며 이 놀이만으로도 약 2시간이 소요될 만큼 서사가 풍부하다. 특히 벌거벗은 홍동지가 오줌을 누는 장면이 실감 나게 연출될 때면 구경꾼들은 배꼽을 잡지 않을 수 없다.

 

풍물놀이 무동 덜미의 연행 장면

 

살판은 땅에서 재주를 부린다고 해서 ‘땅재주’라고도 불렸다. 물구나무를 서고 공중제비를 돌며 마치 중국 무림 영화 속 고수가 화면을 뚫고 나온 듯한 동작을 선보인다. 과거에는 한쪽 편에서 양손으로 발을 받쳐 사람을 들어 올린 뒤 반대편으로 던져 공중에서 다양한 몸동작을 표현하게 하며 멀리 날려 보내는 장면도 있었는데, 이는 가히 사람의 목숨이 오갈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동작이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할 만큼 위험천만한 동작이 가득한 이 놀이의 명칭은 ‘잘하면 살 판이고, 못하면 죽을 판’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버나놀이는 대접 모양의 버나를 나무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재주로, 버나를 위로 던지고 서로 주고받는 등 다양한 동작이 연출되며 익살스러운 연기가 이어져 연신 박수가 터져 나온다. 공연장에서는 조명을 어둡게 한 가운데 대형 버나가 등장하고, LED 불빛과 함께 현대화된 쇼를 관람할 수 있도록 연출되었다.

 

덧뵈기는 탈놀이로, 북한 지역에 발달한 탈춤과 중부지방의 산대놀이, 경상도 지역의 오광대와 야류 등에서 볼 법한 취발이, 먹중, 말뚝이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풍농을 기원하는 비나리를 부르고, 풍자적인 연기를 주고받으며 관객의 흥을 돋운다. 덧뵈기는 가면을 덧대고 세상을 본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살판 버나 덧뵈기 연행 장면

 

영화 <왕의 남자>의 파이널 샷으로 기억되는 줄타기 ‘어름’

 

바라보기만 해도 짜릿한 장면이 연출되는 남사당의 줄타기 ‘어름’은 관객들의 탄성을 수도 없이 자아낸다. 서양 서커스의 줄타기라 하면 긴 장대를 들고 걷는 정도의 장면을 떠올리게 되지만, 우리 남사당놀이는 그 상상을 뛰어넘는다. 줄 위를 걷는 것을 넘어 튕겨 오르고, 무릎으로 기고, 양반다리고 앉고 지그재그로 걷는 등 별의별 동작을 선보인다. 그뿐이랴, 농담을 주고받으며 관객의 웃음까지 덤으로 끌어낸다. 이 멋진 장면은 천만 영화 <왕의 남자>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또 ‘어름’은 세계적인 스포츠 탄생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중 이 줄타기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는 독일인 로버츠 형제가 이를 유럽의 익스트림 스포츠와 결합시키며 슬랙라인이 탄생했다고 한다.

 

남사당패 어름산이의 줄타기 연행 장면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 이들의 줄타기는 관객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고 해서 ‘어름’이라 하였다. 이 줄타기를 하는 줄광대는 또 ‘어름산이’라고 했다. ‘산이’라는 말은 화성 재인청에 소속되어있던 광대들이 경기도당굿을 연행하면서 스스로를 지칭했던 말이기도 하다. 이 용어로 보아 재인청에 소속되어 국가적 행사를 준비하던 줄광대들이 이 남사당패에 함께하면서 연행 종목이 추가되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흥국사 감로탱(좌), 용주사 감로탱(우)

 

재인청 출신이며 경기도당굿의 세습무이기도 했던 이용우(1899~1987)는 남사당패의 땅재주와 줄타기가 ‘산이’들에게서 배워온 것이라고 증언한다. 재인청 광대의 줄타기는 약 43개 정도로, 관청의 행사나 과거 급제자의 축하 연회 등에서 상층부의 기호에 맞게 짜여 있었던 반면, 남사당의 줄타기는 일반 서민들의 취향이 반영되어 약 17개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이다.
줄광대가 솟대를 세우고 두 줄을 걸어 물구나무를 서거나, 거꾸로 매달린 채 악기를 부는 모습 등은 감로탱화(甘露幀畵)에도 남아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그들의 기예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유랑 예인 집단 사당패와 남사당패

 

남사당패는 단단한 규율을 지닌 40~50명 규모의 유랑 예인 집단이었다고 전해진다. 유랑 예인 집단의 역사가 한반도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행히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광대들이 바퀴를 던지고, 공과 막대기를 주고받으며, 장대 위에 서서 걷는 등 자신의 기예를 뽐내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어,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광대들의 활동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복원도(출처 : 2005년 7월 15일 KBS 역사스페셜 – 고구려 고분벽화 세계를 그리다)

 

조선시대의 예인 집단의 활동은 사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유교를 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은 불국(佛國)을 표방한 고려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불교를 탄압하였다. 사찰은 한양 도성 밖으로 밀려나 깊은 산속에 자리 잡게 되었고, 승려들은 포교와 사찰의 재정 확보를 위해 민간으로 시주를 다녔다. 염불을 하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쌀을 얻어 가던 시주승의 모습은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도 남아 있으니, 이러한 전통은 오랜 세월 지속되어 온 셈이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 불당을 새로 짓거나 탑을 건립(建立)하는 등 많은 재정이 필요할 경우에는, 비나리와 염불을 하던 승려를 중심으로 풍물패를 이루어 사찰의 건립금을 모금하였는데, 이들을 비나리패 또는 걸립패라고 불렀다. 남해 화방사에서는 ‘중매구’라는 집단의 기록이 전해지는데, ‘중(僧)’은 승려를, ‘매구’는 풍물을 뜻하니 이들 또한 비슷한 성격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절걸립에도 새로운 양상이 나타난다. 전란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갈 곳 없던 여인들이 절에 의탁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찰에 딸린 건물인 사당(社堂)에 머물면서 절의 대소사를 도우며 지내게 된다. 그러던 중 이 여인들이 걸립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당시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의 외부 출입이 제한되던 조선의 마을에 여인들이 나타나서 판염불, 산타령 등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는 것은 센세이션한 사건이었을 테니 말이다. 자연스레 이 무리를 사당패라고 불렀고 치마저고리에 고깔을 쓴 이 사당패의 구성원을 사당이라 불렀다. 오늘날 전해지는 여러 탈놀이 속에서도 사당의 흔적이 남아 있으데, 한반도 최북단의 북청사자놀음에까지 사당 마당이 존재하는 사실만 보아도 그 사회적 파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부르던 노래는 서도입창, 경기입창, 남도입창이 되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조선 말기 사회가 점차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갈 곳 없던 여인들이 모이는 공간은 점차 다양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절걸립 활동에서 점차 사당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무렵, 새로운 유랑 예인 집단이 나타났다. 이들은 갈 곳 없는 남자아이들을 데려다 기예를 가르치고 공연 판에서 치마저고리를 입히고 머리에 고깔을 씌워 사당의 노릇을 시켰다. 이 소년들을 그들만의 언어로 ‘삐리’라고 불렀다. 여인의 옷을 입고 구경꾼이 입에 물고 주는 엽전을 입으로 받으며 사당의 시늉을 하니 그 새롱거리는 행동이 큰 웃음을 주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남자가 사당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이들이 바로 남사당패이다.

 

남사당패는 사당패보다 더욱 다양한 기예를 선보였으며, 사당패와 달리 절의 직접적인 재정 모금 활동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순수한 예능인 집단으로 활동하였다. 물론 겨울철에는 자신들에게 거주 공간을 내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를 하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이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바로 사당패의 본산이기도 했던 안성 청룡사이다. 안성 서운면의 ‘불당골’이란 지명은 그곳에 그들이 기거하던 청룡사의 사당(社堂)이 존재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안성 서운산 청룡사

 

청룡사의 사당은 남사당패의 정신적 근거지이자 생활의 터전 역할을 하였다. 사당패의 본산이기도 했던 이곳은 자연스럽게 남사당패의 본거지로 이어졌으며, 이들은 청룡사의 신표를 들고 전국을 돌며 연희판을 벌였다. 청룡사는 떠도는 유랑 예인들에게 잠시 멈춰 숨을 고를 수 있는 안식처이자, 다음 길을 준비하는 출발점이었고, 남사당패는 겨울마다 이곳으로 돌아와 공동체를 재정비하며 긴 유랑의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오늘 답사 여정의 마지막으로 서운산 자락에 자리한 청룡사를 찾았다. 서운산(瑞雲山)은 오래전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청룡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을 품은 신령한 산이다. 새벽녘이면 산허리에 걸린 옅은 안개가 마치 용의 숨결처럼 피어오르고, 먹구름이 걷힐 무렵이면 청룡이 다시 하늘로 오르는 듯한 형상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 산자락 깊은 곳에 자리한 청룡사에서, 사당패와 남사당패의 웃음과 탄식, 노래와 장단이 들려오는 듯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참고 자료>
장휘주, 「사당패 관련 명칭에 대한 사적 고찰」, 『공연문화연구』 13권, 2006.
심우성, 『남사당놀이』, 화산문화, 2000.
심우성, 『남사당패연구』, 동문선, 1994.
김세하 외, 『남사당놀이 구조와 덧뵈기(탈놀이) 재담해석』, 선인, 2014.
손태도, 『전통사회 남사당패 성립에 대한 민속예능사적 연구-사당패, 절걸립패, 남사당패의 관계를 중심으로』, 박이정, 2023.
손인애, 『향토민요에 수용된 사당패 소리』, 민속원, 2007.
강우방, 『감로탱』, 예경,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