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벌판 위에 울려 퍼진 춤의 울림, 사랑으로 피어난 ‘재인청춤판’
전통은 시간 속에 고요히 잠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다시 깨어난다. 2025년 6월 7일, 충남 논산의 넉넉한 들녘 한복판에서 열린 ‘재인청춤판’은 바로 그런 무대였다. 조선시대 팔도 재인들의 춤과 연희를 오늘에 되살린 이번 행사는 정주미재인청예술단의 주관 아래, 함께하는 세상 ‘나눔터’의 후원으로 따스하게 펼쳐졌다.
재인청의 맥을 잇는 몸짓들
이날 무대는 연산 백중놀이팀의 흥겨운 ‘대동놀이’로 문을 열었다. 이어 정주미 단장을 비롯한 무용진들이 직접 구성한 작품이 연이어 선보였다. ▲팔박 타령춤 ▲팔박 굿거리춤 ▲진쇠춤 ▲엇중몰이신칼대신무 ▲태평무 ▲한량무 ▲진도북춤 그리고 ▲대동놀이까지, 각각의 춤은 경기 재인청이 품어온 신명과 예인의 정신을 담아 관객에게 전해졌다.
특히 ‘엇중몰이신칼대신무’는 “죽음을 애도하듯 시작되지만 결국 영원을 염원하는 희망의 춤”이라는 사회자 홍희숙의 설명과 함께 고요한 감동을 안겼다. 이어 정주미, 정현숙, 이연희 세 무용가가 함께한 태평무는 9가지 장단을 품은 춤으로, 양반과 평민 모두가 태평성대를 꿈꾸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깊은 울림을 전했다.
태평무
진쇠춤
엇중몰이신칼대신무
사회자는 “관복을 입고 추는 여인의 모습에 의아함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는 단지 복색일 뿐이다. 평화와 화합을 바라는 모두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고 전하며, 태평무와 백중놀이가 결국 같은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 성종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백중놀이는 머슴들의 명절인 음력 7월 15일에 놀고 쉬는 자리였고, 점차 양반과도 어우러져 대동의 무대로 발전해왔다.
“논산의 옛 이름이 ‘놀매’였다고 합니다. 땅이 누렇다는 뜻이죠. 황금벌판인 이곳에서 오늘의 춤이 피어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사회자의 한마디는 공연의 배경마저 따뜻하게 감쌌다.
‘춤추는 의사’ 김세철, 무대 위에 선 풍류
이날 무대의 특별한 감동은 ‘춤추는 의사’로 알려진 김세철 비뇨기과 전문의는 신라 화랑의 정신을 담은 재인청 창작무 한량무를 통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량은 단순한 멋이 아니라, 정신과 인품을 갖춘 존재입니다. 김세철 선생님은 그 진정한 의미를 몸소 보여주신 분입니다.”라는 소개와 함께, 그가 선보인 춤은 의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한량무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정주미 단장에게 춤을 사사받으며 무대에 오른 그의 모습은 ‘예술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는 진리를 증명했다. 그의 무대는 그 자체로 존경받을 만한 여정이자,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의 표본이었다.
나눔으로 완성된 춤판, 사람을 사랑하는 마을의 품
이번 재인청춤판이 더욱 빛났던 것은 무대를 이룬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무대를 품은 공간 덕분이었다. 공연이 열린 논산 ‘나눔터’의 주인장, 김갑수 씨는 ‘갑수 오빠’라는 애정 어린 호칭으로 불리며 따뜻한 환대를 선사했다. 그는 20년 넘게 정주미 단장과 함께 전통을 지켜온 인연을 언급하며, “이곳은 단지 땅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자리”라며 의미를 전했다.
갑수오빠, 김갑수 씨
“우리 마을 어르신들과 봉사자들이 사흘 전부터 손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이 자리는 먹는 자리이기 이전에 마음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는 삶, 그것이 행복이고 건강입니다.” 그의 인사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셨다.
사회자 홍희숙 역시 “관촉사 미륵불처럼 익살스럽고도 의젓한 논산의 사람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함께한 모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공동체”라며, “이 따뜻한 기억이 언젠가 여러분의 가슴에서 다시 춤추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춤과 사람과 나눔이 만든 하나의 공동체
공연의 마지막은 다시 한 번 진도북춤과 연산 백중놀이의 ‘대동놀이’가 장식했다. 관객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춤판에 동참하며, 그야말로 모두가 함께하는 축제의 장이 완성되었다. 이날의 춤판은 단지 전통을 되살리는 예술의 현장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따뜻한 눈길과 정성을 나누는 공동체의 잔치였다.
황금벌판 논산에서 피어난 재인청의 춤은, 그 옛날처럼 오늘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삶이 힘겨운 어느 날, 그 기억은 다시 발끝을 흔들게 하고, 마음을 들썩이게 할 것이다. 그날의 신명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조용히 우리 안에 쌓여 있다가 다시 춤출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