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 위의 명인 살아있는 시간 > 조오환의 조도닻배노래, 타령연곡
2025년 6월 12일(목) 동대문쇼핑타운 9층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전통공연창작마루 광무대 극장 < 길 위의 명인 살아있는 시간 > 셋째 날 저녁 7시 30분 공연 ‘바다노래 들노래 - 닻배와 논머리에서’ 조오환 조도닻배노래 무형유산 보유자(인간문화재)가 진도문화예술교육원 고미경 원장의 반주로 약 한 시간동안 조도닻배노래, 타령연곡을 두 번째 판으로 펼쳤다.
또드락 장단에 관객들의 만복축원을 빌어주는 비는소리로 시작한 무대는 조도닻배노래 ‘어허허 술비야, 에이야 술비야’ 그물을 싣는 ‘술비소리’ – ‘어영차야’ 노젓는 소리로 닻배를 띄우고 ‘어이기야’ 그물당기는 소리 ‘기야소리’로 닻배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어서 조오환이 어린나이에 진도를 떠나 객지생활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 스스로 익힌 장타령 – 만년필타령 - 뱀타령 – 엿타령으로 무대의 열기를 뜨겁게 달구어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허화 어화요 어어화 어화여’ ‘풍장소리’ – 만선으로 동네에 돌아와서 한바탕 놀며 부르는 뒤풀이노래 ‘산아지타령’으로 막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국악계 최고 광대명인 ‘조오환’의 신명은 관객의 마음을 황홀의 감동으로 가득 채웠고, 조오환을 따라 들썩이는 관객의 환호는 객석에 흥분으로 녹아 내렸다. 쏟아지는 박수소리와 끝없이 펼쳐지는 추임새가 어울러져 이곳이 아름다움이 춤추는 무도회 장인지, 기쁨에 빠져 즐거움이 넘치는 파티장인지, 관객과 함께 더없는 기쁨이 뿜어지는 시간이었다.
약간 탁하면서도 걸쭉하며 정이 흐르는 조오환의 소리는 체계적인 학습과 스승으로부터 배운 소리가 아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물려받았고, 진도 전역으로 타작소리 등 농요 메김 소리를 하러다니던 외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아 타령과 재담소리 등 우리소리를 잘하셨던 어머니 ‘박색구’의 소리를 태아 때부터 듣고 자라면서 절로 몸에 익힌 소리이다.
조오환은 전라남도 무형유산 제40호 조도닻배노래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엿타령의 명인이다. 1949년 전남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에서 오남오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열 살 때 아버님 상여 앞에서 한복을 입고 춤을 추었다. 열 자식을 키우기 위해 손수 엿을 빚어 팔았던 홀어머니의 힘든 삶의 여정을 보면서 성장하여 일흔 일곱 세월 동안 진도 민속 국악예술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진솔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준다. 조오환의 국악인생 삶은 참 자랑스럽고 살아 숨 쉬는 진도 민속 국악예술의 보고(寶庫)이다.
어머니 박색구는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한동네에서 연애결혼을 하였지만 일찍 남편을 잃어 생활을 위해 집에서 엿을 만들어 파셨다. 밤새도록 맷돌에 보리를 갈고 하루 종일 엿을 고면서 육자배기나 엿타령을 하셨는데 조오환 엿타령 사설의 대부분은 이때 듣고 익힌 사설이며 엿타령 사설 속 풍자는 어머니의 눈물이다. 어머니는 비는소리(비손)도 잘하셨는데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어디서든지 비셨기에 이 영향으로 조오환 타령의 사설은 살아 움직이는 소리이다.
다른 고기는 안 잡고 조기만 잡는 어선에 닻을 많이 싣고 다니다하여 닻배라 하고 2월부터 4월까지 100일 동안 조기를 잡아 말리면 ‘굴비’가 되는데 생조기를 ‘술비’라 한다. 닻배노래는 1950년대 닻배 어로가 소멸한 후 현장에서 사라졌다. 조도닻배노래는 1976년 조도닻배놀이로 남도문화재에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으나 활동이 이어지지 못하다 1992년 조오환을 중심으로 닻배노래보존회를 재구성하여 2006년 전라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현재는 거의 무대공연화가 되었다.
< 길 위의 명인 살아있는 시간 > ‘조도닻배노래, 타령연곡’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도닻배노래의 맛과 색깔, ‘조오환’ 국악광대 명인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어 우리의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커다란 감명을 받은 뜻 깊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