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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서의 우리음악유산답사] 범패(梵唄)에 젖어 드는 진관사(津寬寺) 수륙재(水陸齋)

 

범패(梵唄)에 젖어 드는 진관사(津寬寺) 수륙재(水陸齋)


10월 셋째 주말 조선왕조에서 공인한 유일한 불교 의례였던 수륙재가 벌어지는 진관사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곳 진관사는 원래 신혈사라는 작은 암자였으나 고려 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종이 증축해 주면서 그 절 주지스님 이름으로 명명(命名)된 절이다. 현종은 대량원군 시절에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간통으로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자 하여 그녀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었는데, 신혈사 주지인 진관(津寬)의 보호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역사를 간직한 진관사는 기암적벽의 아름다운 북한산을 배경으로, 알록달록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수림이 어우러져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었다. 

 

진관사 일주문

 

수륙재(水陸齋)는 물(水)과 땅(陸) 위를 떠도는 귀신을 위해 명복을 비는 불공 즉 제사(齋)를 뜻한다. 이 불교 의식은 굶어 죽은 귀신인 아귀에게 음식을 베푸는 인도의 시아귀회(施餓鬼會)에서 유래된 의례로, 고려 광종 시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佛國)을 표방했던 고려에서 수륙재는 연등회, 팔관회와 더불어 행해졌던 거대한 불교 의식 중 하나로 주로 죽은 망자를 천도(薦度)하는 의식으로 쓰였다. 이 의식은 왕실의 공적인 의례뿐만 아니라 민간 의례로도 퍼져나가 고려 불교문화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교의 나라 조선, 그러나 이성계는 수륙재에 정성을 다했다.

 

고려왕조를 붕괴시키고 1392년 건국한 조선은 유교를 이념으로 한 사대부의 나라이다. 왕부터 신하, 지배계층 양반들 모두 유교를 신봉한 사대부였다. 따라서, 스님을 왕의 스승인 왕사(王師), 국사(國師)로 모시던 불교의 나라 고려에서 행해졌던 연등회와 팔관회라는 불교 의례는 폐지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족을 강화, 거제, 삼척 등지로 유배시켰으며, 자신의 혁명을 따르지 않는 세력이 남아 있는 개경은 버리고 한양으로의 천도를 감행했다.

 

이성계는 고려의 장수였다. 아무리 혁명에 성공했다 해도 자신이 모시던 왕과 왕실의 친인척들을 척살하는 마음이 편키야 했겠는가만은 그들을 남겨 두고서는 혼란한 정국를 정리하고 제대로 나라를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그 일을 감행한다. 왕씨 일가에게 맹인 점쟁이에게 그들의 명운을 점쳤다는 죄를 뒤집어씌운 뒤, 그들의 죄를 엄벌하라는 17번에 달하는 신하들의 상소를 물리치는 절차를 거치고 나서 도륙을 시작하였다. 상소를 물리치는 마음이 형식적인 것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잔혹한 군왕이라는 민심 반발의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본인이 저지른 살육(殺戮)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1395년 그 주검들 가까운 개성의 관음굴, 삼척의 삼화사, 거제의 견암사 세 절에서 왕씨 일족의 천도(薦度)를 비는 조선왕조의 첫 수륙재가 설행(設行)된다. 멸망한 나라의 죽검들은 그 권력을 찬탈한 새 왕조의 왕이 치러 준 성대한 천도 의식과 함께 역사 저편으로 그렇게 사라져 갔다. 

 

한양 천도 후에는 이곳 진관사에 수륙사(水陸社)라는 수륙재를 지내기 위한 59칸의 건축물을 지어 1398부터 국가에서 주도한다고 하여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가 설행되었다. 태종은 1413년 홍역에 걸려 12살 어린 나이에 죽은 늦둥이 넷째아들 성녕대군을 위한 수륙재를 열기도 하였고, 세종은 1420년에 설행한 기록을 실록에 남겼다. 이렇게 국행으로 설행된 진관사의 수륙재는 연산군대까지 지속되지만, 연산군을 폐주 시킨 성리학자들에 의해 그만 혁파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큰 전란으로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면서 민간 주도의 수륙재의 설행이 성행되어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이 강화될수록 사찰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왕실과 함께했던 불교 의식이 사라져 그를 통해 얻던 경제적 지원도 끊기자 불교는 시선을 돌려야 했다.  불교의 대중 선교활동의 치중 현상은 사활을 건 진화였던 것이다.


수륙재에서 만나는 우리 음악 범패와 작법

 

불교의 의식에 쓰이는 음악을 범패(梵唄)라고 한다. 범(梵)은 인도 산스크리트어인 브라만을 패(唄)는 낭독을 뜻하는 파사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브라만은 우주 만물의 근원, 달리 말하면 부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부처의 가르침을 낭독한 것이 ‘범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범패는 불교와 함께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범어(인도어)로 된 범패는 중국에서는 그들의 문자인 한자로 차용되었고 이 한자로 된 범패를 신라시대 진감선사(眞鑑禪師:774~850)가 배워와 우리에게 전파하였다. 이를 어산범패(魚山梵唄)라고 한다. 어산(魚山)은 원래 중국 산동성에 있는 산 이름이나, 위(魏)나라 무제(조조)의 넷째아들 조식이 이 산에서 노닐다 범천의 소리를 듣고 범패를 창시했다고 한다. 이 설에 의해 어산은 범패의 다른 말로 쓰인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감선사가 중국의 범패를 배워오기 전에도 우리 땅에 이미 범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 19년(760) 4월 초하루 해가 두 개(또 하나의 해는 핼리혜성이었을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추측이 있음)가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자 승려 월명사(月明師)를 불러 이를 해소하려 하였다. 월명사는 ‘저는 그저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어 향가만 알 뿐 범패의 소리는 익숙하지 못합니다.’라고 고하고 4구체 향가인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노래하여 괴변을 물리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보아 이미 범어로 된 범음범패(梵音梵唄)가 쓰이고 있었으며 불교음악으로 향가가 포교에 널리 쓰였다는 것도 유추할 수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범어보다는 우리말로 된 향가가 포교에는 유리했을 터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진관사 수륙재 범패 짓소리(https://youtu.be/DBKqjYHLpxc)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함께 한국 3대 성악으로 불리는 뛰어난 음악성을 지닌 장르이다. 필자가 진관사에서 촬영한 영상을 통해 진관사 수륙재에서 연행되는 범패를 짧게나마 감상하며 현장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바라춤                                      법고무                                나비춤(착복무)

 

불교 의식에서 추는 무용을 작법이라고 하는데 수륙재에서는 바라춤, 법고무, 나비춤을 볼 수 있다. 바라를 들고 추는 바라춤이라 하고, 법고라고 하는 북을 두드리며 추는 춤을 법고무, 양손에 꽃을 들고 추는 춤을 나비춤 혹은 접무(蝶舞)라고 한다. 나비춤은 흰 장삼 소매가 늘어진 양손에 꽃을 든 모양이 나비처럼 보여 붙여진 명칭으로 법복을 입고 춤을 춘다고 해서 착복무(着服舞)라고도 하고 작법무로 통칭하기도 한다.

 

범패 홋소리(https://www.youtube.com/watch?v=ecLbsAO-Q9I)

 

바라춤이나 법고무, 나비춤을 출 때 반주 음악은 태징과 태평소, 범패의 홋소리가 쓰인다. 범패는 크게 보통의 승려들이 염불을 부르는 안채비소리와 범패승들이 전문적으로 부르는 바깥채비 소리로 구분한다. 범패승은 먼저 혼자서 부른다는 뜻의 홋소리를 배우고 홋소리를 다 배운 후에는 한문으로 된 산문이나 범어로 된 짓소리를 익힌다고 한다. 짓소리는 여럿이 고음의 소리를 지르는 특징을 표현한 명칭이다.


중국에서 온 어산범패(魚山梵唄) 이전의 불교음악

 

기원전 560년 석가모니에 의해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서기 67년 후한(後漢)의 명제가 불상과 경전, 그리고 두 명의 인도승을 모시고 와서 낙양에 백마사(白馬寺)를 창건한 것을 시점으로 중국에 전파되었다. 고구려는 서기 372년 소수림왕 때 중국 전진의 부견왕이 불상과 경문을 준 시점, 백제는 384년 침류왕때 인도승 마라난타의 불법 전도를 시점으로, 신라는 그보다는 많이 늦은 527년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불교 음악이 우리에게 전파된 것은 진감선사의 대공탑비문(830)에 따라 진관선사가 당에서 배워온 것을 그 시작으로 삼는 것이 통설이다. 지리산 쌍계사에는 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어산(魚山)’이란 불교 음악을 작곡하였다고 전하는 팔영루(八泳樓)가 있다. 중국이 범어로 된 인도 불교음악을 중국화 했듯이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배워온 범패를 우리화(化) 시켰음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궁중정재 무애무(https://www.youtube.com/watch?v=dCIGe7oyajg&t=6s)

 

그러나,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지 300~400년이나 지나서 음악이 들어왔다는 것은 무언가 석연치 않다. 게다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월명사의 도솔가 이야기는 그 이전 우리의 불교음악이 이미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해골바가지로 깨달음을 얻고, 과부였던 요석공주를 얻기 위해 파계승이 되어 대학자 설총을 낳은 것으로 유명한, 돈키호테 같은 원효(617~686)대사가 대중 교화를 위해 만들었다는 무애무(無㝵舞)의 존재도 우리 불교음악이 이미 존재했음을 이야기해 준다. 불교가 전래될 때 경전뿐만 아니라 불교 의식까지 전해졌을 것이고 그 의식에는 음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감선사 이전에 불교음악이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우리 불교가 중국을 통하지 않고 인도에서 직접 전파되지는 않았을까?

 

가야불교는 452년 금관가야 8대 질지왕이 왕후사를 세운 시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김수로왕(42~199)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과 결혼을 한 사이이다. 불교를 굳이 중국을 통해 전래 받을 이유가 있었을까? 신라의 토우에서 터번을 쓴 아랍인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처용무의 처용가면도 아랍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볼 때 고대 한반도에서 중국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인도와 교류가 있었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가야불교에 대한 증거는 허왕옥이 가져 온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파사석탑을 호계사라는 절에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탑은 불교의 상징물이다. 삼국유사 어산불영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가락국 경내의 연못에 독룡이 만어산 나찰녀와 사귀는 바람에 4년간 가뭄이 지속되어 김수로왕이 부처를 청하여 설법한 후 나찰녀가 오계를 받고 재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어 가야불교의 존재를 짐작케 한다. 김해 월명사 사적비에 따르면 장유화상(長遊和尙)은 허왕옥의 오빠로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들여온 것으로 소개되어 있고, 수로왕과 허황옥이 첫날밤을 보낸 곳을 명월산이라 하고 훗날 이 산에 신국사, 진국사, 흥국사 세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최근 이 절들의 절터로 추정되는 곳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김수로왕의 자녀는 열두 명으로 아들 열에 딸이 둘인데, 첫째는 왕위를 잇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가 되고, 넷째부터 일곱째 왕자는 지리산에 가서 성불(成佛)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이 설화를 간직한 절이 지리산 칠불사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설화와 고고학 자료들이 중국불교 전래 이전에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추측할 만한 증거가 많이 존재하고 있다. 

 

오늘은 진관사 수륙재를 통해 우리 음악 유산인 범패, 작법 등 불교 음악과 불교가 우리 땅에 전래된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본 칼럼이 종교를 떠나 음악 유산으로서 불교 음악을 접하고 그 가치를 귀히 보는 사유의 확장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마무리 한다.
    

최은서(한성여중 교사, 국악박사)


<참고자료>
국립무형유산원, 『진관사 수륙재』, 민속원, 2017 
박범훈, 『한국불교음악사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23
도명, 『가야불교, 빗장을 열다』, 담앤북스, 2022
강호선, 「조선 태조 4년 國行水陸齋 설행과 그 의미」, 한국문화 62권, 2013, 199~234쪽 
김성혜, 「신라의 불교음악 수용에 관한 고찰」, 한국음악연구 40집, 2024, 5~20쪽
김학자, 「韓國 佛敎音樂의 歷史的 展開에 관한 硏究」, 원광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2001
조정옥, 「가야불교 전래에 관한 재검토」, 인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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