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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가야금·농죽동음·해금이 빚어낸 ‘현의 축제’… 열다섯 번째 울림이 더 깊어지다

국가무형유산 향제줄풍류로 연 문(門), 전통의 깊이를 다시 세우다
거문고·고쟁·해금이 펼친 다채로운 현악의 결… 창작과 협연이 만든 새로운 울림
열다섯 해의 축적, 일파가야금합주단이 들려준 현악 합주의 품격

 

가야금·농죽동음·해금이 빚어낸 ‘현의 축제’… 열다섯 번째 울림이 더 깊어지다

 

부산의 겨울바람이 부는 가운데 열린 이번 공연은 첫 곡부터 특별했다. 일파가야금합주단은 매 공연마다 첫 문을 국가무형유산 구례향제줄풍류로 여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85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뒤 올해로 지정 40주년을 맞은 구례향제줄풍류는 향토적 멋과 고유의 선율을 품고 있으며, 이 곡으로 공연의 시작을 여는 단체는 일파가야금합주단이 유일하다. 부산시와 부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열린 이날 무대 역시 이 특별한 시작으로 객석의 숨을 고르게 했다.

 

이어 등장한 이는 거문고 연주자 정대석 교수. 그는 석탑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창작곡 ‘무영탑’을 통해 거문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였다. 거문고의 16괘를 타악기처럼 두드리고, 춤을 추듯 술대를 움직이며 만들어낸 다층적 음향은 거문고가 지닌 또 하나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객석은 곡이 끝나자 ‘귀가 정화되는 느낌’이라는 탄성을 터뜨릴 정도였다.

 

세 번째로 소개된 무대는 중국 고쟁연주자 왕웨이의 26현 고쟁 초연 무대였다. 스물한 줄이 표준인 고쟁을 26줄로 확장한 특별 제작 악기로 연주된 ‘추야사(秋夜思)’는 깊은 가을의 정취를 품어냈다. 그 섬세함은 한국의 가야금과 또 다른 선율의 흐름을 만들어, 동아시아 현악기의 매력을 직접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공연의 중심에는 단장 장혜숙의 제자들로만 구성된, 창단 29주년의 전통을 이어온 일파가야금합주단이 있다. 전국에서 보기 드문 ‘30년 단일 스승 제자 구성’ 연주단체라는 점은 이들의 음악적 결속과 깊이를 말해 준다.

 

일파가야금합주단 단장 장혜숙

 

이어진 무대는 김영재 선생의 곡 ‘적념’을 일파가야금합주단이 새롭게 편곡한 협연 무대였다. 전남대학교 곽재영 교수가 편곡해 가야금·플루트·해금의 조화를 이룬 이번 버전은 전통적 구성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해 새로운 울림을 선사했다.

 

특히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부산교육대학교 정은경 교수의 해금 연주였다. 정 교수는 2022년 음악 교과서에서 국악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에 가장 앞장서 싸웠던 인물로, 학자로서의 활동이 주로 알려져 있지만 이날 무대에서 드러난 연주자의 면모는 그 이상의 감동이었다. 오랜만에 무대에 선 정 교수는 ‘오랜 공백’이라는 말이 무색한 단아하고 깊이 있는 해금의 결을 보여주었다.

 

정은경 교수의 반짝이는 표정, 여유 있는 제스처는 반준승의 플룻과 절묘하게 안착해 객석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플룻의 맑은 선율 위에서 해금의 떨림과 호흡이 겹겹이 쌓이며 만들어낸 순간적 화성은 ‘정은경 교수의 진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청중들은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박수를 터뜨렸고, 기자 역시 그의 무대에서 드러난 탁월한 감성과 음악적 지성을 더 자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해금의 정은경 교수

 

공연 후반부에는 홍종진 교수, 이기설 교수와 함께한 천년만세, 그리고 이스라엘 민요를 흥겹게 재편곡한 하바나길라, 마지막으로 이준호 작곡의 ‘그리움’ 협주곡이 이어졌다. 가야금과 고쟁이 서로 주고받듯 대화하는 마지막 무대는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선율로 표현한 듯 관객들의 마음을 오래 붙들었다.

 

순간마다 전통의 깊이와 창작의 감각이 교차했던 이번 공연은, 일파가야금합주단이 왜 30년 가까이 지역과 전국에서 사랑받는 연주단체인지 다시 한번 입증한 자리였다. 부산 문화계의 저력과 전통음악의 품격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