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인간을 만든다: 조지프 헨릭 교수, 경주 국제포럼서 누적문화 이론 조명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최휘영, 이하 문체부)가 경상북도(도지사 이철우), 경주시(시장 주낙영)와 함께 9월 19일(금)부터 21일(일)까지 경주예술의전당 일대에서 ‘2025 국제경주역사문화포럼’을 개최한다.
특히 눈에 띄는 인물은 세계적 석학으로 인정받는 하버드대 조지프 헨릭Joseph Henrich 교수이다. 그는 인간학, 진화심리학, 경제학 등을 넘나들며 “인간 사회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가”를 조명한다. 헨릭 교수의 이론은 매우 독특하다. "사람은 똑똑해서 잘 사는 게 아니라, 서로 배우고(사회학습) 계속 덧붙여 개선하는 문화(누적 문화) 덕분에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명제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자이다.
그의 이론을 간략히 소개한다.
첫째, 왜 ‘문화’가 그렇게 중요할까?
등산 초보가 혼자 길 만들고 지도 그리면서 정상까지 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보통은 다른 사람의 기록, 블로그, 유튜브, 지도앱, 장비 추천을 보고 배워서 간다. 헨릭 교수는 인간이 바로 이렇게 서로의 지식과 습관을 배우고 이어 붙여 살아온 존재라고 말한다. 이 덕분에 기술, 레시피, 규칙, 제도가 세대마다 업데이트되어 더 좋아진다.
고향 어머니의 김치 레시피도 같은 맥락이다. 한 세대에선 작은 변화였지만 몇 세대가 지나면 우리 집 김치 기술이 된다. 이런 누적이 쌓이면 한 세대 머리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술·제도(법, 학교, 시장, 공공 서비스)가 만들어진다.
헨릭은 유전자와 문화는 ‘맞물려’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우유를 오래 마셔온 문화(낙농)가 있는 지역에선 우유 소화 능력(유당 분해)이 더 많이 확산되었다.
즉 문화가 생활환경을 바꾸고, 그 환경이 유전적 적응을 자극하고,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람은 ‘혼자’보다 ‘함께’ 배울 때 더 강하다. 운동도, 메이크업도, 코딩도 잘하는 사람 걸 보며 더 빨리 는다. 바로 사람은 사회적 학습(관찰·모방·피드백)에 최적화되어 있다.. 특히 명성 편향적이다. 유명·존경받는 사람 것을 더 따라 하고, 잘된 방법을 더 따라 하기 마련이며, 다수가 하는 걸 더 따라 하는 유행편향적이다. 이런 학습 습관(편향) 덕에 좋은 아이디어가 빨리 퍼진다. 다시 말해 유전은 고정적이고, 문화는 부가물이 아니라 둘이 서로 밀고 당긴다는 얘기다.
헨릭은 또한 문화는 ‘정보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문화는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클라우드와 같다고 설명한다. 레시피북, 규칙, 관습, 법, 튜토리얼, 교본 등에 저장하고, 시대·환경에 맞게 수정, 조합, 단순화하는 가공 기술이며, 가족·학교·회사·미디어·플랫폼(유튜브, 틱톡) 등에 저장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어떤 공동체는 빠르게 배우고 고치는 습관 덕분에 더 빨리 발전한다. 헨릭은 인간은 ‘문화 종(species)’이라고 설파한다. 사람은 큰 뇌, 언어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문화 덕분에 인간다워졌다는 게 헨릭의 관점이다.
도시 교통, 병원 시스템, 계약·법, 학교, 기업조직, 표준 작업법(SOP) 같은 건 개인 한 명의 머리로 설계할 수 없는 복잡함이다. 세대마다 조금씩 업그레이드된 결과물이다. 그래서 제도·종교·규칙은 중요하자는 것이다. 교통신호, 분리수거, 줄서기, 표준계약, 회계 규범 같은 건 사람들끼리 잘 협력하기 위해 만든 문화적 도구이다.
이런 제도(룰북) 덕분에 서로 모르는 사람들도 비교적 공정하게 거래하고, 신뢰를 쌓고, 큰 규모로 협력할 수 있다. 헨리은 이런 협력의 설계도가 문화 속에 들어 있고, 그게 사회 전체의 성능을 좌우한다고 본다.
헨릭은 서구(서양·교육·산업·부유·민주) 사회 사람들의 심리 특성이 전 인류 보편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서구식 문화에 비판적 입장이다. 예를 들어 개인 중심 사고, 계약 중심의 인간관계, 규칙·문서·법을 중시하는 태도는 특정 역사·종교·제도의 영향으로 강화된 심리 스타일일 수 있다. 문화가 사고방식 자체를 조율한다는 뜻이다.
헨릭의 이론을 토대로 세계를 휩쓸고 있는 K-드라마·K-뷰티를 설명해본다. K컬쳐는 오랜 기간 쌓인 문화의 누적 결과이다. 연습생 시스템, 작곡·안무 제작 네트워크, 영상미·편집기술, 팬 커뮤니티 운영, 해외 유통 전략, 번역·자막·클립 편집, SNS 활용법까지—디테일이 수만 개 누적되어 “보기 좋고 따라 하기 쉬운” 형태가 됐다. 혼밥 신입에게 맛집 지도 + 대표 메뉴 + 주문 요령 + 후기가 한 번에 떡하니 주어면 국가적 문화적 접근 장벽이 확 사라진다.
현재 유튜브, 틱톡, 스트리밍 플랫폼 덕분에 춤 챌린지, 리액션, 커버, 밈이 번개처럼 퍼진다. 헨릭의 이론으로 설명하면, 권위/성공/유행 편향이 동시에 작동하다는 의미다. K-콘텐츠는 한국적 정체성(언어·정서·미장센·패션·음식)을 살리되, 자막·편집·길이·스토리 구조 등은 세계 시청자의 취향에 맞게 조절한다. 즉 고유함(uniqueness) + 접근성(accessibility) = 글로벌 파급력이다.
그러면 왜 지금 한국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가. 우선 기술의 발달이다. 스마트폰·스트리밍·숏폼이 전 세계를 실시간 연결한다. “새롭고 다른 것”을 원하는 세계 소비자라는 수요가 풍부하고, 댓글·데이터로 즉시 피드백 받고 다음 작품에 반영하는 학습속도가 빠르면서도, 정부·산업·교육의 장기적 축적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헨리히 식으로 말하면, 전파 경로·학습 속도·제도 설계가 동시에 좋아진 ‘좋은 진화 환경’을 갖춘 셈이다. 지속 가능성을 위해 유념할 점도 있다. 먼저 새로움의 피로이다. 모두가 같은 포맷을 복제하면 신선함이 줄어든다.
과도한 표준화도 우려된다. 소수 포맷·스타에 과하게 쏠리면 다양성 저하되는 점이다. 다른 나라에서 같은 코드가 다르게 읽힐 수 있는 문화 맥락위 차이도 있다. 아울러 노동·저작권·공정 등 제도적 설계가 공정해야 지속 가능한 혁신이 가능하다. 즉 다양한 실험과 학습-전달의 속도를 유지하되, 공정한 제도로 창작 생태계를 넓혀야 누적 문화의 선순환이 계속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