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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조선의 진정한 마지막 광대, 이동안이 남긴 이야기’ 국악타임즈 연재 시작

 

‘조선의 진정한 마지막 광대, 이동안이 남긴 이야기’ 국악타임즈 연재 시작

 

오늘 12월 6일, 조선 후기 예인 문화의 마지막 숨결을 지녔던 운학(雲鶴) 이동안(李東安, 1906~1995) 선생의 생일을 맞아, 국악타임즈가 이동안 선생의 생전 육성을 담은 귀중한 기록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이 기록은 국가무형유산 ‘발탈’ 예능보유자 박정임 선생과 민속학자 고(故) 심우성 선생이 남긴 사료로,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국악사적 자료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자료는 전통춤과 연희의 대가로 평가받아온 이동안 선생이 직접 구술한 생애 기록으로, 전례 없이 방대하고 생생한 내용이 담겨 있어 국악계 안팎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국악타임즈는 이 기록을 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 김승국 이사장이 정리한 주석과 함께 연재한다.

 

〈연재의 변〉

(아래는 김승국 이사장이 집필한 원문을 그대로 게재합니다.)


‘조선의 진정한 마지막 광대, 이동안이 남긴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조선 후기, 재인(才人), 무부(巫夫), 광대(廣大) 등 예인들의 자치 조직이었던 화성재인청(華城才人廳)의 마지막 도대방(都大房)으로 알려진 고(故) 운학(雲鶴) 이동안(李東安) 선생의 수제자이자 평생의 동반자였던 국가 무형유산 ‘발탈’ 예능보유자 박정임(1939~) 선생께서 2025년 11월 19일 오후 선생의 자택 인근 카페에서 나에게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다.

 

그것은 민속학자 고(故) 심우성(1934~2018) 선생이 생전에 검정 사인펜으로 ‘귀중자료’라고 손으로 꾹꾹 눌러 써서 박정임 선생께 보내주신 노란 서류 봉투였다. 봉투 안에는 이동안 선생 생전인 1982년 3월 5일부터 6일까지 이동안 선생이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님을 불러 자신의 삶을 소상하게 구술하신 것을 심우성 선생이 정성 들여 받아 쓴 25매가량의 타자기로 쓴 원고였다.

 

원고를 꺼내 보니 이동안 선생님의 삶뿐만 아니라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전통연희, 판소리, 민요, 기악 등 국악 전반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적혀있었다. 물론 이동안 선생님의 일방적인 구술 내용이라 사실 여부에 대한 검증은 필요하겠으나 국악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에게는 귀중한 참고자료가 될 내용이었다.

 

나는 고민하였다. 박정임 선생님께서 연구자인 나에게 이 자료를 넘겨주시면서 “내가 87세의 고령인 데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자료를 내가 그냥 갖고 있기보다는 믿을 수 있는 김 선생에게 넘겨주고 싶다”라는 말씀만 하셨다. 박정임 선생님께서 그 귀중한 자료를 넘겨주신 뜻은 그동안 저평가되었던 이동안 선생님의 예술 세계가 왜곡됨이 없이 정당하게 평가받게 하시겠다는 의도가 있으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 자료를 나 혼자 갖고 있기보다는 국악을 사랑하는 애호가들과 연구자들에게 공유하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라 생각하고 ‘국악타임즈’에 연재하기로 하였다. 아무쪼록 이 자료가 우리 국악사를 바로 잡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25년 12월 6일
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에서 김승국


 

제1회
연재자 (註)

 


보편적으로 누구나 자기 집안에 대해서는 애정이 있고 자부심이 있다. 이동안 선생의 진술 내용 모두가 사실일 수도 있고 과장된 내용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동안 선생의 고향이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라는 것과 가계가 세습 예인 가계이고 화성재인청 예맥의 집안이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판단된다.



화성 재인청 세습 도대방 집안에 태어나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이라는 데가 내 고향이거든. 전주 이씨 효령대군 십육대 손이야. 송곡리라는 데가 원래 소릿골인데 왜 그런고 하니 육대조 할아버지가 이곳에 처음 왔는데 집도 없고 외딴데라 청계고을 소리산이란 데 가서 소리를 하면서 청대콩을 심었어. 그랬더니 소리가 듣기 좋으니께 사람들이 꾀서(모여서) 동리가 되고 그 동리 이름이 소릿골 소리산이여.

 

육대조 할아버지가 줄을 참 잘타는 분이셨나봐. 하도 잘타니 하루는 임금(정조 또는 순조로 추정됨)이 태보자 해서 줄을 탔거든. 줄을 타면서 재담을 늘어놓면 웬갓 할 소리 못할 소리 없이 다하지.

 

만조백관이며 구경군들이 다들 좋다고 야단들인데 임금을 떡 쳐다보더니 “저 사람이 내 조카여” 그런단 말이여.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니께. 그랬더니 신하들, 대신들이 저런 죽일놈이 있느냐고 저놈 당장 목을 치라고 그러니께 임금이 “아서라 줄타는 사람 재담이라는 것은 못할 소리가 없는 법이니 저걸 어떻게 앞에서 죽일 수가 있느냐 한강에다 줄을 매놓고 건너오게 해라” 그런단 말여.

 

한강에다 줄을 매니 좀 길어? 건너오다가 죽으란 소리지. 줄이 길수록 출렁출렁 늘어지거든. 한강가에 백성들이며 만조백관이 다 나와서 구경을 하게 됐어. 임금도 나와설람은 불쌍한 것을 죽인다 하는데 아 쬐끔한 사람이 저기서부터 줄을 건너오면서 뭐라고 하는데 따북따북 틀림없이 건너오거든.

 

딱 건너와 서서는 “아 우리 조카 땜에 한바탕 죽을뻔했네” 그랫단 말이야. 그걸 보고는 임금님이 천재다 저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니께 죽이지를 못한다 하면서 진사벼슬을 줬어. 진사벼슬을 받아서 송곡리 일판이 진사댁이라고 했지.

 

안채가 아마 열댓칸 되고 바깥채가 여나문칸 되고 어쨌든지 집이 커. 임금이 준 벼슬이니께 틀림없이 진사벼슬이여. 헌데 그 양반이 벼슬은 떡 받았는데 일생 배운 것이 줄꾼이라 벌어먹고 살 것도 없고 재미도 없거든.

 

그래 다시 임금 앞에 가설람은 임금님 내가 헐것이 없으니께 팔도 예인들이 꾀는(모이는) 관청이나 하나 맹글어주시오 그랬거든. 그랬더니 임금이 어떡헐려고 그러니 물으시니 제가 예인들을 모아다가 시험을 봐서 뽑겠습니다. 뽑아서 제가 회비를 받겠습니다.

 

그래서 재인청이 생긴거여. 팔도도대방청이지. 그 뒤로 대대로 도대방을 해온거여.(이옹(李翁)이 어렸을 적에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은 집안내력)


 

다음 연재일은 12월 15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