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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한혜경, 삶과 춤의 경계를 넘어 - 허튼풍류산조춤에서 흥지무까지 “청춘의 불꽃을 피우자, 그리고 한을 풀자”

허튼풍류산조춤, 자전적 서사와 자유의 미학이 만나다
설장구에서 12체 장고춤까지, 한과 흥이 교차한 대미의 무대
살풀이에서 흥지무까지, 삶의 애환을 품은 예인의 고백

 

한혜경, 삶과 춤의 경계를 넘어 - 허튼풍류산조춤에서 흥지무까지 “청춘의 불꽃을 피우자, 그리고 한을 풀자”

 

지난 11월1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공연 ‘타·흥·태Ⅴ(打·興·態Ⅴ)’의 예술감독 한혜경 선생이 무대 위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관객의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이날 무대는 전통춤의 원형을 잇고 그 안에 개인의 삶을 녹여낸 안무로 구성되어, 예술과 인생이 교차하는 감동의 순간을 선사했다.

 

공연의 첫 무대는 임미례 명인의 태평무로 시작되었다. 한영숙제 박재희류 태평무를 선보인 그는,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춤의 본질을 단아하고 고고한 춤사위로 표현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절제된 동선 속에서 나라의 평화와 백성의 안녕을 비는 기원의 정서가 담겨, 공연의 서막을 여는 데 걸맞은 격조와 품위의 무대로 관객의 호응을 받았다.

 

“허튼풍류산조춤은 묘한 춤이에요. 정형화된 음악 속에서 허튼이 들어가고, 그 반주에는 풍물장단이 섞여 있습니다.” 한혜경 선생의 설명처럼 허튼풍류산조춤은 일정한 음악 형식 위에 즉흥성과 자유로움이 공존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한혜경에게 이 춤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생의 고비를 넘어선 자전적 서사이기도 했다.

 

2018년, 위중한 수술을 앞두고 “이제는 성한 몸으로 춤을 추기 어렵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올린 무대가 바로 이 ‘허튼풍류산조춤’의 시작이었다. “하늘에 목숨을 구걸하는 심정으로 울며 춤을 추었다”는 고백은 관객의 마음을 적셨다.

 

그녀는 이번 공연에서 그 절박함을 “청춘에서 불꽃을 피우자”는 희망으로 바꾸어, 박은하 명무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전달했다.

 

이번에 박은하 명무가 선보인 허튼풍류산조춤은 산조의 규격화된 음악 형식에 ‘허튼’이라는 엇박자를 넣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흐르다 어느 순간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 순간은 마치 ‘케이팝 데몬헌터스’의 골든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환희를 느끼게 했다.

 

박은하 명무가 선보인 허튼풍류산조춤

 

이 작품은 한혜경 선생이 오랜 세월 쌓아온 기량과 철학이 응축된 결과물로, 우리 음악과 춤이 지닌 탄탄한 기본기 위에 세계무대에서도 통할 예술의 보편성과 완성미를 증명한 무대였다. 그녀의 춤은 한국 전통춤의 근본에 뿌리를 두되, 그 위에 인간의 삶과 감정을 자유롭게 풀어낸 ‘현대적 전통무(傳統舞)의 정점’으로 평가받을 만했다.

 

이어서 소개된 ‘푸너리입춤’은 동해안 별신굿의 시작을 알리는 푸너리 장단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부정을 없애고 나쁜 액을 제하며, 새로운 정화의 의미를 담은 춤이에요.” 한혜경은 이 춤을 통해 “관객과 자신, 그리고 모든 이의 삶에 좋은 기운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전했다.

 

네 번째 무대인 ‘이매방류 살풀이춤’은 한혜경이 직접 선보였다. “살면서 쌓인 서러움, 무거움, 슬픔들을 살풀이로 풀어내는 시간이었다”고 밝히며, 단순한 전승이 아닌 감정의 정화와 예인의 고백으로 확장했다. 그녀는 “춤은 몸으로 하는 기도이자, 생의 눌린 감정을 풀어내는 제의(祭儀)”라고 덧붙였다.

 

이매방류 살풀이춤을 추는 한혜경 명무

 

공연의 후반부는 흥으로 이어졌다. 권명화류 소고춤을 제자 김승애·송나경·김윤서가 이어받아 선보였고, 남성무의 활력이 돋보이는 조태욱의 채상소고춤이 관객의 박수를 이끌었다. 한혜경은 “이 친구는 ‘노(No)’가 없는 제자”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보존회 상임이사 신근철이 무대에 올라 설장고춤을 선보였다. 절제된 호흡과 강렬한 타법이 어우러진 연주는 “독보적인 연주력”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객석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이어 무대의 분위기는 다시 서정으로 전환되었다. 박은하·임미례의 2인무 〈흥지무〉는 흥타령의 구슬픈 선율에 맞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냈다. 한혜경 선생의 말처럼 “기쁨과 눈물은 종이 앞뒷장 같다”는 삶의 역설이 고스란히 춤결에 스며들었다.

 

마지막 순서로 선보인 〈12체 장고춤〉은 장단의 변화 속에 한과 흥이 교차하는 한국춤의 정수를 완성했다. 무대는 절제된 동작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공존하는 대미로 마무리되며,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공연을 마무리하며 한혜경은 관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오늘 이 춤들을 보시며 마음의 찌꺼기가 정화되고, 복이 깃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어 “12체 장고춤에는 본래 설장고가 없으며, 이번에는 고(故) 이정범 선생님의 가락을 일부 접목해 공연의 묘를 살렸다”고 덧붙이며 예술적 원형과 변형의 경계를 명확히 했다.

 

이번 공연에서 한혜경 선생의 해설은 단순한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예술, 그리고 전통의 맥을 하나로 잇는 진정한 구술무(口述舞)였다. 그녀의 말처럼, 정형 속에 허튼이 스며들고, 슬픔 속에 흥이 묻어나는 춤, 그것이 바로 한혜경이 전한 한국춤의 본모습이었다.